“많이 배워가서 이태석 신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겠습니다.”
인제대 일산백병원 응급의학과에는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가운을 입고 분주히 응급실을 누비는 이방인 의사 한명이 있다. 선진 의료기술을 체험하고 익히기 위해 6월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온 말왈 사비노(31)씨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지낸 고 이종욱 펠로우십(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운영) 프로그램을 통해 6개월 과정 연수생 자격으로 입국했다. 남수단은 성직자, 의사, 교육자, 건축가로 봉사하다 암으로 숨진 이태석 신부의 삶을 그린 영화 ‘울지마 톤즈’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 신부가 다니던 의대라 느낌이 각별하다”는 그는 1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한국이 아니라 의대생들의 교과서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로 배울 게 많아 즐겁다”고 활짝 웃었다. “병원에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집에 있으면 출근 시간만 기다려진다”고도 했다. 김경환(51) 응급의학과 교수는 “지도교수가 야근을 하거나 휴일 당직을 서는 날에는 함께 근무를 설 만큼 열의가 넘친다”며 “이 친구 앞에 서면 옷 매무새도 다시 다듬게 된다”고 했다.
사비노씨는 아직 전공이 없는 일반의다. 다양한 전공 중에서도 다들 힘들어 기피하는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데에는 조국의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남수단에선 피를 흘리고 있는 환자도 외래 환자들 사이에 줄을 섰다가 치료받을 정도로 ‘응급’의 개념이 없습니다. 한국의 응급 시스템을 가장 먼저 도입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그는 소문만 듣던 한국의 선진형 응급 구호 시스템을 몸소 겪었다. 7월15일 집에 들어가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배를 잡고 쓰러지는 그를 본 경비원의 신고로 5분도 채 안돼 자신이 공부하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수술을 받았다. 그는 “앰뷸런스도 없는 남수단에서 이 일이 벌어졌다면 복막염으로 진행돼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외래와 응급 환자를 구분해서 이른바 골든타임(중증외상 환자의 생사가 결정되는 시간)을 확보한다면 병원에서 사망하는 환자 수를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고 덧붙였다.
사비노는 한국 의사들 사이에선 ‘미래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의사’에 비유된다. 지난해 수단에서 독립한 남수단은 오랜 내전의 상처와 정치 사회적 불안정으로 한국과는 달리 의료서비스 기반이라고 할 만한 게 전무한 탓이다. 800만여명의 인구에 의사 수는 국내 웬만한 병원보다 적은 180명에 불과하다. 사비노씨를 지도하고 있는 김 훈(38) 응급의학과 교수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연말까지 더 많은 걸 가르치기 위해 영상의학과 등 다른 과에 파견하고 있다”며 “사비노처럼 선진 의술 습득에 대단한 열의를 갖고 있는 신생국 의사 초청 연수는 더 많은 ‘이태석’을 키우는 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ㆍ사진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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