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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부상 경찰대원들 정신과 치료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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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부상 경찰대원들 정신과 치료는 전혀 없었다

입력
2012.09.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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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고 생각했었어요. 눈을 떠보니 병원이더라고요."

A 경찰대원은 2009년 1월20일 새벽, 자신의 발 앞에서 치솟던 불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당시 서울경찰특공대 소속으로 용산 농성 철거민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새벽 6시30분, 컨테이너 박스에 실려 용산구 남일당 옥상에 내려질 때만해도 불과 40여분 뒤 자신을 덮칠 화염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농성자들이 남아있던 망루에 다가가자 시너 냄새가 아주 지독하게 났다. 그 순간, 바로 앞에서 불이 타올랐고 순식간에 몸에도 옮겨 붙었다. 그는 "어디가 출구인지 알 수도 없었고 보이지도 않았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죽는구나'싶었고 (살기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작전 당시 가까이에 있던 고 김남훈 경사는 세상을 떴다. A 대원은 "자기 몸이 화염에 휩싸였을 때 고통과 충격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며 "지금도 악몽을 꾸는 건 물론이고 아직도 출동할 때면 그 때 기억에 괴롭고 힘이 든다"고 호소했다.

이른바 용산참사 당시 투입된 경찰특공대원들은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육체적 부상에 대한 치료만 있었을 뿐 정신적 치유조치는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0일 한국일보가 단독 입수한 '용산참사 당시 투입된 경찰특공대 현황'을 보면, 용산참사 당시 투입된 경찰특공대 2개 제대 대원 99명 중 19명이 화상, 일산화탄소 중독, 휘발성용제 중독, 타박상 등의 부상을 입었다. 투입된 경찰 5명 중 1명이 부상을 당한 셈이다. 석모 순경(당시 계급)은 얼굴 화상으로 14주, 강모 순경은 얼굴과 머리, 목 화상으로 9주 진단을 받는 등 화상 환자가 11명으로 가장 많았다.

투입대원들은 모두 경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 등 정신과 조치는 없었다. 당시 특공대원들의 사후조치 업무를 맡았던 경찰 관계자는 "물리적 외상에 대한 치료만 했다"며 "정신적인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용산참사 재판 당시 경찰특공대원들은 이미 진술서를 통해 "유독가스와 화염에 싸여 고통을 호소하는 상황은 생지옥과 비교될 정도였다", " 훈련된 저도 순간 순간 공황상태의 정신이었고 아비규환의 현장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며 끔찍했던 상황이 남긴 후유증을 증언했다.

최정석 서울대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외상 후 스트레스가 있다고 진단되면 통상 최소 3~6개월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화재 등의 특수한 사고로 인한 후유증은 육체적인 상처가 당시 기억을 상기시켜 더 오랜 관찰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이들에게는 일종의 경찰공무원 보험인 맞춤형복지 공상위로금, 경찰특공대위로복지기금, 경찰공제회의 공상부담금 등을 합해 개인당 53만원에서 883만1,415원까지 위로금 성격의 돈만 나왔다.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아 공상(公傷)에 따른 정부 보상금은 없었다. 투입대원들은 대부분 경찰병원 치료가 끝나는 대로 일선에 복귀해 업무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영국 등 주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선 경찰공무원이 주요 사건이나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부상을 당하면 신체 치료뿐 아니라 정신과 진료와 휴식이 보장돼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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