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영웅호걸이 명멸한 중국 춘추시대에 첫 패자(覇者)가 된 이는 제(齊)나라 환공이다. 그 패업 성취의 일등공신은 관중이었다. 우리에게 포숙아와의 아름다운 우정, 즉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관중은 원래 제나라 제후 희공의 둘째 아들 규(糾)의 사부 겸 책사였고, 포숙아는 셋째 아들 소백의 그런 역할을 맡았다. 두 사람은 한 동네에서 자란 죽마고우였다. 관중을 규의 사부 자리에 추천한 것도 일찍 관직에 나간 포숙아였다. 하지만 규와 소백이 제후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자 서로에게 최대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싸움에서 포숙아의 지모로 소백이 승리하고 제후 자리에 올랐다. 그가 환공이다.
패배한 규는 죽임을 당했고, 그의 핵심참모이자 소백을 죽이기 위해 직접 독화살을 쐈던 관중도 참형을 면하기 어렸다. 그러나 환공은 패업을 이루기 위해 관중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포숙아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이지 않고 재상으로 삼았다. 과연 관중은 내정과 외교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환공을 천하 제후국들을 호령하는 첫 패자로 만들었다. 관중은 죽으며"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라는 말을 남겼다.
안철수 교수 불출마 협박 내지 종용 논란의 핵심 인물인 안 교수측 금태섭 변호사와 새누리당 전 공보위원 정준길 변호사 간 다툼은 언뜻 관포지교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은 서울대학교 법대 86학번 동기다. 사법시험은 금 변호사가 한 기 빠르지만 둘 다 비슷한 시기에 검찰에 들어갔다. 먼저 검찰을 떠났던 정준길은 나중에 금태섭이 변호사 개업을 할 때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86학번 법대 동기들에게 개업식 참석과 축하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정준길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캠프 공보위원이 됐고, 금태섭은 안철수 교수 진영에 몸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우정이 관중과 포숙아 만큼이나 깊은 것이라면 이번 대선 최대 라이벌로 부상한 경쟁자 진영의 선봉에 각각 섰더라도 변할 리 없다. 그러나 금 변호사가 "정준길 새누리당 공보위원장이 전화로'안 원장이 출마할 경우 뇌물과 여자 문제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불출마를 종용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사달이 났다.
정 변호사는 20년 지기인 금 변호사에게"안 교수에 대해 시중에 떠도는 여러 의혹에 잘 대비해야 할 것이다"는 취지로 전화를 했다고 해명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대권을 다투는 경쟁 진영에 몸담았지만 우정만은 지키고 싶은 친구의 아름다운 마음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탈이 나지 않았으면 훗날 '금정지교(琴鄭之交)'로 칭송 받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 사람의 친정인 검찰 조직과 동문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로는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우정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학시절 정준길은 운동권이었고, 금태섭은 그런데 별 관심이 없는 등 케미컬이 달랐다. 무엇보다 안철수 검증 전담자임을 공공연히 밝혀온 정 변호사와 이를 방어하는 금 변호사는 창과 방패의 관계로 상대방을 걱정하거나 동정할 위치가 아니다. 이번에 문제된 산업은행 뇌물사건 담당 검사였던 정 변호사는 자신이 입수한 소문과 첩보를 토대로 슬쩍 상대측의 반응과 분위기를 떠 보려 했을 수도 있다.
설사 순수한 의도였다 해도 안 교수측에서는 협박과 종용, 그리고 사정기관의 조직적 뒷조사로 받아들일 여지는 적지 않다. 안 교수를 돕고 있는 사람들은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감시와 뒷조사를 당하고 있다고 여긴다. 얼마 전 보도된 경찰의 안 교수 사찰설과 역대 대선국면에서 일부 사정기관들이 보여온 행태는 그런 의심을 부추긴다. 2007년 대선 한나라당 경선 때는 국정원 TF팀의 박근혜 후보 뒷조사 자료가 유출돼 큰 문제가 됐었다.
사정기관들이 정권 교체기에 마냥 중립을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많지 않은 건 그래서다. 박 후보는 "친구끼리 얘기를 침소봉대하는 것은 구태"라고 했다. 하지만 음습한 공작정치의 망령이 아직 우리사회를 배회하고 있다면 틀린 말이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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