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장을 접사렌즈로 촬영한 듯, 닳고 헤진 책 귀퉁이에서 삐쳐 나온 얇은 실오라기까지 손에 잡힐 것처럼 세밀하고 선명하다. 1970년대 이후 국내 미술계의 극사실주의 대표 화가로 자리해온 이석주(60·숙명여대 교수)씨의 신작 10여 점이 9월 25일까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선보인다.
사물을 집중적으로 바라봄, 곧 주시(注視)를 통해 사물 자체의 존재성을 부각해온 그는 70년대에는 거친 벽돌을, 80년대에는 도시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풍경을 묘사하며 암울한 현실과 현대문명을 비판해왔다. 그리고 90년대 중반부터는 기차, 시계, 의자, 책, 꽃, 말 등으로 '서정적 풍경'시리즈를 이어왔다.
그가 배경에 머물던 책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2년 전. '서정적 풍경' 연작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오던 이씨는 "장식적인 이야기를 줄이고 단순한 책을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책에 대한 존재성이 곧 자신의 존재성과 연결된다는 이순의 작가는 사물의 정확한 모습을 담기 위해 표현의 극한까지 몰고 갔다.
하얀 캔버스에 에어브러시로 책을 가능한 정교하게 그리고 그 위에 붓으로 색을 입힌다. 두터운 유화 물감이 마르면 다시 덧칠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다음, 질감까지 살리기 위해 칼이나 송곳으로 물감을 긁어낸다.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거쳐 100호 크기의 작품 한 점을 꼬박 한 달에 걸려 완성했다.
"서로 다른 챕터가 모여 한 권의 책이 완성되는 것처럼 그동안 다뤄온 소재는 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라고 말하는 이씨는 캔버스에 그려진 낡은 책을 보면서는 이렇게 묻는다. '나는 과연 실존적 존재인가?'라고. (02)732-3558
이인선기자 kell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