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선거본부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선거 팸플릿 300만 부에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인물 사진이 실린 것이다. 시세대로 하자면 300만 달러 이상을 물어주어야 할 판이었다. 선거본부장은 숙고 끝에 저작권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을 전국에 알릴 수 있도록 당신 사진을 우리가 팸플릿에 실어주면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는가?"
그 편지에 이런 답장이 왔다. "기회를 줘서 고맙다. 250 달러 내겠다." 기막힌 반전이었다. 300만 달러짜리 손해를 250 달러의 이익으로 뒤집은 셈이다. 거기에 궁벽한 상황의 전후 문맥을 잘 파악하여 적절하고 순발력 있는 조치를 통해 전혀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인 지혜가 잠복해 있다. 창의적 아이디어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그 창의력이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평범한 일상의 표층 아래에 숨어 있는데도, 다만 우리가 잘 찾아내지 못할 뿐이다.
우리나라도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로 접어들었는데, 내친 김에 선거 얘기를 하나 더 해 보기로 하자.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73세의 로널드 레이건과 그의 측근들은 '대통령이 되기에 너무 늙었다'는 대중적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 선거전의 가장 큰 과제라고 판단했다. 경쟁자인 월터 먼데일 후보가 줄곧 레이건의 고령을 문제 삼고 나섰다. 이 과제가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두 후보의 TV 토론에서였다.
먼데일이 먼저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레이건이 전혀 엉뚱한 답변으로 맞받았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먼데일이 어이가 없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레이건은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모든 청중은 박장대소하며 웃었고 먼데일도 결국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는 두 번 다시 나이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이 예화의 교훈은 단순히 대통령 선거에서 수준 있는 유머를 보았다는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유머가 얼마나 참신하고 감동적인 창의력을 바탕에 두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프랑스 속언에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생각을 하지 말라'는 표현법이 있다. 창의력이 있는 유머는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널리 주위와 세상을 이롭게 한다. 반면에 마른 장작 같이 딱딱한 언사로는, 아무리 논리 정연한 주장을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아 감응력을 일으키기 어렵다.
미국 대통령들의 일화를 살펴보던 중이니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기로 하자. 한국 식탁의 김치처럼 서양 식탁에 빠지지 않는 것이 브로콜리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얘기이다. 부시 대통령이 어느 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자기 음식에 브로콜리를 넣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 일은 곧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다. '부시는 브로콜리를 싫어한다'는 풍문과 더불어 브로콜리의 판매량이 급감했다. 애꿎은 피해를 본 브로콜리 재배 농장주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놀라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미국 농민들은 거친 항의나 데모 대신에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대형 화물차에 가득 실은 브로콜리를 백악관에 선사했다. '대통령님! 미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영양분 많은 채소입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셔서 즐겨 드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사건이 다시 언론에 크게 보도될 때, 부시는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나는 그때 브로콜리를 너무 많이 먹어 잠시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화를 복으로 바꾸었다. 엄청난 홍보 효과와 더불어 급기야 브로콜리는 외국 수출의 효자 품목이 되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감동이 살아 있는 유머는 물리적 계산이나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는 기적을 창출한다. 꼭 100일이 남은 이번 대통령 선거가 예전처럼 이전투구의 늪으로 침몰하지 않도록, 예선이나 본선의 후보들이 이 대목을 조속히 깨우쳤으면 한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후보가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김종회 경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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