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백의 서정… 가을신부 면사포 드리운 듯
중복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딱 사흘이다. 메밀은 그때 씨앗을 뿌려야 한단다. 며칠만 일러도 알이 여물기 전에 곯아버리고, 며칠 늦으면 수확 전에 서리가 내린다. 감자, 강냉이도 다 떨어지면 먹는 구황 중의 구황 작물이 메밀이었다. 그래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어쩌고 읊은 것은 기실 유산자 계급의 감흥이었을 텐데, 먹고 살 만해진 요즘 세상엔 소출에는 관심 없고 그저 꽃을 보자고 씨를 뿌리는 작물이 메밀이다. 요샌 비탈진 산허리 대신 자동차 잘 들어가는 목 좋은 곳에 메밀을 심는다. 궁핍한 시절 입으로 들어갔던 메밀이 돈으로 바뀌어 주머니로 들어가는 셈. 어쨌거나 또, 메밀꽃 필 무렵이다.
수지가 안 맞아 수십 년 동안 들에서 보기 힘들던 메밀을 비싼 밭뙈기 한가운데 심게 만든 건 역시나 가산 이효석의 소설이다. 이야기, 혹은 사연을 좇아 여행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뜻일 게다. 봉평은 가산이 나고 자라서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로 그려낸 땅이다. 숨죽이고 읽어야 할 풍경, 이를테면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는 산하는 분명 지금의 봉평과 거리가 멀다. 메밀로만 따지자면 경북 봉화나 충북 옥천의 메밀밭이 더 넓고 운치 있다. 그러나 여행객이 찾는 곳은 역시 봉평. 4차선 자동찻길 옆, 요란한 메밀음식점 앞에서도 사람들은 기꺼이 허생원이 되고 동이가 된다.
"멥쌀(메밀)을 맷돌에 타기면(갈면) 이게 쌀(메밀분)만 나온대요. 그걸 저기 물레방앗간에서 빻아가지고 반디기(반죽)해서 먹는데, 옛날엔 그걸 가식기라고 했어. 메밀가식기. 삶아서 건져 기름 발라놓으면 애들도 잘 먹었거든."
가산의 소설 속에서 허생원이 성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보냈던 물레방앗간(이라고 생각되는 곳의 방앗간을 복원해둔 곳) 앞에서 게이트볼 치러 읍내 가는 노인들과 만났다. 봉평 토박이 김부기(79)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메밀이라는 작물의 이름은 "살아야 하니까"라는 말과 붙어 있었다.
"옥수수, 감자 해서 여름만 먹구 말우? 겨울에도 먹고 살아야지. 옛날엔 하지만 지나면 감자도 다 캐먹고 없어요. 그리곤 또 뭘 해 먹어야 하는데, 이기(메밀) 젤루 빨리 자라잖아. 한 달이면 꽃 피고, 두 달이면 알이 여물어. 그래 물에다 울궈가지고 강냉이하고 같이 밥 지어 먹었지. 그래서 살아나간 기야."
봉평은 화전민이 깃들던 산골이다. 산을 태워 만든 화전은 지력이 약했다. 강냉이, 감자 캐고 나면 씨를 뿌릴 수 있는 게 메밀인데 그나마 제대로 여물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툭 하면 흉년이었다. 김 할머니의 부모님들은 덜 여물어 먹기 힘든 메밀도 버리지 않고 건사해 뒀단다. 덜 여문 메밀 알갱이를 능쟁이라고 불렀다. 능쟁이로 국수를 만들면 젓가락으로 그릇을 한 바퀴 훑기도 전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봉평에서 메밀은 징그러운 세월의 지긋지긋한 끼닛거리였던 셈. 생존의 방편으로 메밀을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가산이 묘사한 "흐붓한 달빛"은 먼 얘기일 것만 같다. 그러나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남편 박상진(75)씨의 회상이 퍽 뭉클했다.
"이거 심고 나면 꽃 필 때 음력 보름이 한 번씩 지나거든. 그럼 메밀꽃 핀 산이 온통 화안-한 게…. 근데 그냥 환하면 재미 없어. 날이 잠깐 흐려야지. 밤하늘에 구름 지나갈 때면, 그냥 가슴이 알쑹달쑹알쑹달쑹해지는 게 잠을 못 자."
요새 봉평을 찾는 관광객들은 물레방앗간이나 복원된 가산의 생가, 폐교된 무이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평창무이예술관 주변 메밀밭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멀리서 보면 꽃은 눈송이 같기도 하고 팝콘 같기도 한데, 밭으로 들어가 보면 하얀 꽃잎 가운데 분홍색 꽃술이 박힌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 꽃이 핀 건 가을 메밀이다. 메밀은 본래 이모작이 가능하다. 봄메밀은 이삭이 부실하고 꽃도 탐스럽지 못해 전엔 가을 메밀만 볼 수 있었다. 요새는 봄부터 가을까지 연중 메밀꽃을 볼 수 있다. 언제든 '메밀꽃 필 무렵'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밭마다 시간차를 둬 씨를 뿌리기 때문이다. 전엔 밭을 도지로 빌려주는 것만 못했지만, 지금은 메밀을 심으면 군에서 평당 얼마씩 보조금까지 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태풍 두 개가 꼬리를 물고 지나간 지난 주 봉평의 메밀밭은 중복 무렵 뿌린 씨앗이 피운 차진 메밀꽃으로 풍성했다. 평창무이예술관에서 작업 중인 화가 정연서씨는 메밀꽃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꽃은 포근한 흰색, 잎은 맑은 푸른색, 대궁은 힘찬 붉은색이잖아요. 서양화에서 쓰기 힘든 색깔은 다 갖고 있어요, 얘가. 작은 꽃이 밭을 이루고 있으니 그리자면 한없이 지루하죠. 그치만 빠져들게 돼요. 오늘은 또 어디까지 빠져들겠구나, 그런 예감을 갖게 만들죠, 메밀꽃이."
봉평장이 서지 않는 날이라 차를 타고 장이 열린 평창 읍내로 갔다. 40년 가까이 메밀로 전과 전병을 부쳐 파는 함임직(80) 할머니는 배가 부르도록 메밀전을 지져 놓고 2,000원을 받았다. 태풍이 지나간 날이라 장은 썰렁했다. 30리씩 강냉이 한 말, 콩 두어 말 지고 오는 장꾼들로 북적거렸다는 평창장엔 '올림픽시장'이라는 생경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오늘은 장이 개불알"이라고 투덜대면서도 할머니는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연신 솥뚜껑에 기름을 둘렀다. 전도 전병도 맛이 심심했다. 동행한 이는 금방 젓가락을 놨는데, 그 무덤덤하지만 정겨운 강원도의 맛에 나는 자꾸만 손이 갔다.
■ 여행수첩
●영동고속도로 장평IC에서 나와 6번 도로를 타고 가면 봉평면에 닿을 수 있다.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장평행 시외버스가 수시로 운행된다. 장평에서 봉평까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2012 평창효석문화제'가 7~16일 봉평면 효석문화마을 일대에서 열린다. 효석백일장 등 문학 행사와 나귀 타고 생가 가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효석문학선양회 (033)335-2323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 효석마을에서 평창읍까지 '효석문학 100리길'이 최근에 조성됐다. 평창강을 따라 메밀밭, 장터, 팔석정 등을 둘러볼 수 있는 걷기 코스다. 평창군 문화관광과 (033)330-2771
평창=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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