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가 없는 게 요즘 트렌드다."
패션업계 관계자들이 최근 들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예전에는 스키니 팬츠가 유행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스키니 팬츠를 구입했고, 라이더 재킷이 유행이면 모두 하나쯤은 사서 걸쳤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메가 트렌드'가 없는 대신 '다양한 스타일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유행보다 개성을 좇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때문에 패션 업체들도 시즌별로 선보이던 스타일 수는 확 늘리는 대신 해당 품목별로 소량씩만 생산한다. 해외 유명 SPA(제조ㆍ유통 일괄형 의류) 브랜드가 국내에서 확고히 뿌리를 내리면서 국내 패션업체들도 'SPA 스타일'로 바뀐 것이다.
무엇보다 해외 SPA의 성공이 국내 패션산업에 불러온 가장 큰 변화는 '토종 SPA'의 출현과 성장을 들 수 있다. 가장 먼저 SPAO, 미쏘, 미쏘 시크릿 등 SPA 브랜드를 내놓았던 이랜드는 이미 자리를 잡았고, 올해 상반기 제일모직이 선보인 에잇세컨즈도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최근 여의도에 오픈한 IFC몰, 10월 오픈하는 인천 스퀘어원 등 대형 쇼핑몰에는 자라, H&M, 유니클로 등 해외 SPA 브랜드와 나란히 입점하고 있다.
이제 중견 패션업체나 신진 디자이너들도 토종 SPA 브랜드를 내놓고 있다. 신성통상은 6월 22일 서울 대학로에 토종 SPA 브랜드 '탑텐' 1호점을 연 뒤 7월에 명동점을 오픈했다. 반응이 좋아 다음달에는 스퀘어원에도 매장을 낼 계획이다. 탑텐 명동점은 값비싼 홍보ㆍ마케팅을 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상품 구색이 호응을 얻어 불황에도 6억원이 넘는 월 매출액을 올린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각광 받는 '스마일마켓'은 신진 디자이너 33인이 뭉쳐 만든 토종 SPA 브랜드로 1주일에 200가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신규 브랜드가 아닌 SPA가 등장하기 전부터 있었던 기존 브랜드들도 'SPA스타일'로 체질을 바꾸고 있다. SPA의 등장으로 여성 캐주얼ㆍ캐릭터 브랜드의 백화점 매출이 급감하면서 SPA처럼 ▦다품종 소량생산 ▦빠른 상품 교체 ▦중저가 등을 통해 변신을 꾀하는 브랜드가 많아진 것. 과거 시즌마다 1,000개 정도의 스타일을 내놓았다면, 지금은 1,500~2,000개 정도로 늘리는 대신 제품 별 생산량은 줄이는 식이다. 가격도 예전보다 저렴해졌다.
백화점과 대리점 등 소규모 매장 대신 명동, 가로수 길, 홍대 등 패션 중심 거리나 복합쇼핑몰에 대형 플래그십 스토어를 내는 것도 'SPA스타일'로 변신한 패션업체들의 생존 전략 중 하나. 이는 예전보다 훨씬 증가한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패션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콘셉트를 제시하려면 대형 매장이 필요하기 때문. 이 같은 추세는 스포츠, 아웃도어, 슈즈 등 유사 업종에도 유행처럼 번져나가, 서울 명동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 매장이 들어서고 있다.
한 중견 패션업체 관계자는 "불황으로 백화점과 대리점 매출이 줄고 있는 반면 주요 상권에 대규모 직영점을 여는 신규 브랜드의 성과는 매우 좋은 편이어서 앞으로도 주요 상권에서 패션업체들의 점포 임대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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