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사랑과 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이 죄로 미끄러지거나 죄가 복숭아 속의 벌레처럼 사랑 안에 깃든다.'
중견 작가 이승우(52)씨가 1960~80년대 군사독재 치하에서 참혹했던 한국 사회 현실을 특유의 관념적이고 세밀한 언어로 풀어낸 장편소설 <지상의 노래> (민음사 발행)를 냈다. 등단 이후 일관되게 현실 속 구원의 문제를 탐구한 작품을 써온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사랑과 죄의식의 문제를 다뤘다. 지상의>
"십여 년 전 같은 제목으로 썼다가 실패했고 올해 초 다시 썼다"는 이번 소설은 다섯 명의 사연이 맞물리며 진행된다. 우선 형 강영호의 미완성 원고를 정리해 유고집을 만들고 수도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동생 상호의 사연이다. 그는 형의 원고를 읽은 후 천산수도원을 답사하고, 수도원의 3평 남짓한 72개 지하 방에 쓰인 성경 구절(벽서)들을 발견한다. 다음은 강영호의 책을 읽은 교회사 강사 차동연의 사연. 그는 폐허가 된 수도원 발굴에 참여해 그 수도원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 신자들의 무덤인 '카타콤'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인물은 기독교 신문에서 차동연의 글을 읽은 '장'이다. 군사정권 독재자의 오른팔 노릇을 한 한정효(네 번째 인물)를 그곳에 유폐시킨 뒤 수도원 길목에 초소를 세워 감시했던 장은 차동연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지막 인물 '후'는 사촌 누이 연희를 사랑했지만, 연희를 겁탈하고 버린 박 중위를 칼로 찌르고 천산수도원으로 도피한다. 이씨는 "5명의 입을 빌렸지만 사실은 후에 관한 이야기"라며 "후가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초월적 관념을 보여준다면 한정효는 후의 대척점에 서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각 사연의 중심에는 천산수도원이 있다. 해발 890m의 그곳은 강영호의 군 복무지, '장'이 한정효를 가둔 장소, 후가 스스로를 유폐시킨 장소이며 성경 속 헤브론 성을 연상시킨다. '우발적인 살인과 같은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피의 복수를 피해 들어가도록 허락 받은 도피성'이다. 한정효를 가두는 과정에서 장은 수도사의 절반을 수도원 밖으로 내몰고, 후는 이곳을 나와 세상을 떠돌며 자기 욕망의 근원을 탐구하며 고뇌한다. 그런 동안 또 다른 장군이 권력을 잡고, 문제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이곳을 덮쳐 좁다란 지하 방에 수도사들을 넣고 산 채로 매장한다. 작가는 "벽서는 역사와 세상에서 탈출하려 했지만 결국 발목 잡히는 형제들의 안식을 위한 참회록"이라며 "죽은 형제들의 영혼을 지켜주기 위한 의식의 의미, 세상의 권력이 인간의 삶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상황에서 슬픈 구원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말했다.
등장 인물들의 사랑, 이념, 욕망이 권력에 의해 부서지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초월자에 대한 믿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둘 모두 근본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임을 보여준다. 천산수도원의 벽서와 초기 기독교 경전인 '켈스의 책'을 겹치는 장면, 작중 인물들의 고뇌와 번민이 성경 구절과 맞물리는 장면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이 빛난다.
작가는 "수도사들이 카타콤을 찾아 천산수도원을 헤브론 성으로 만들지만 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카타콤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메시지는 소설 말미에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후가 수도원을 다시 찾아가 한정효와 몰살당한 수도사들을 묻는 장면, 마지막으로 그가 산채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장면, 수십 년 후 차동연이 이 곳을 찾아 비밀을 캐내며 72개의 방을 파헤쳐 수도사들을 찾아낸 장면에서는 일종의 경건함마저 느껴진다. 한국 현대사의 굴절을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들여다본 수작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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