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기업 '배임죄 공포'/ "업무상 배임" "경영상 판단"…검찰 자의적 판단 여지 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기업 '배임죄 공포'/ "업무상 배임" "경영상 판단"…검찰 자의적 판단 여지 커

입력
2012.09.02 17:40
0 0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뤄진 불가피한 경영판단이었다."

한화그룹은 검찰이 김승연 회장을 업무상 배임혐의로 기소한 이후, 줄곧 '경영상의 판단'이란 점을 강조했다. 법원이 지난달 16일 검찰의 기소를 받아들여 김 회장에 대한 법정구속 판결을 내렸지만, 지금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김 회장에 적용된 배임죄는 그룹 계열사를 동원해 부실관계회사(한유통 웰롭)을 지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해당계열사에 수천억원의 손실을 입혔다는 것. 한화 관계자는 "구조조정을 통해 부실계열사가 살았고 김 회장이나 어떤 임직원도 개인적으로 취득한 이득은 없었다"면서 "만약 그 때 그런 의사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더 큰 손실이 올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역대 재벌총수나 CEO들이 기소된 사례를 보면, 조세포탈 등을 제외하면 횡령 및 배임죄 관련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배임은 매번 처벌수위에 관계없이 배임이냐, 경영판단이냐의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횡령으로, 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은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기소돼 10월 1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검찰은 두 형제가 공모해 SK텔레콤, SK C&C 등 계열사가 베넥스에 투자한 2,800억원 가운데 497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는데, SK측은 "이자를 쳐서 갚은 만큼 피해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도 21억여원 규모의 배임과 미공개정보를 통한 주식손실을 회피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박 회장측은 경영권 분쟁에 따른 허위진술에 기반된 것인 만큼 혐의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재벌 총수 경제범죄사건을 직접 수사했던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도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총수 배임죄의 경우 명확한 피해나 이득의 규모를 특정하기가 힘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배임에 따른 이득규모에 따라 형량이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수사당국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는 얘기다.

재벌총수건은 아니지만, 검찰의 자의적 판단으로 배임죄가 적용된 대표적 사례는 정연주 전 KBS사장 케이스다. 검찰은 지난 2008년8월 정 전 사장을 특경가법상 배임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면서 "KBS가 국세청과의 1심 재판에서 이겨 2,448억원의 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는데도 연임을 노린 정 전 사장이 적자를 메우려고 2심 재판부의 조정을 받아들여 556억원밖에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2심은 물론 대법원도 "(KBS와 국세청) 양측 모두 양보해야 하는 조정의 특수성 등을 감안할 때 업무상 배임으로 보기 어렵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결국 공기업사장으로서 정부기관과 싸우기 보다 조정을 선택한 것을 두고 검찰은 '연임을 위해 회사손실을 입힌 것'으로 몰고 갔는데, 한 관계자는 "당시 검찰 기소는 결국 과거 정부에서 임명된 정 전 사장을 몰아내기 위한 것 아니었나. 배임죄의 포괄적 적용이 정치적으로도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부를 상대로 '무리수'를 남발하고 있는 한국전력 역시 '배임'때문이란 지적이 많다. 김중겸 한전사장은 10%이상의 전기요금 인상을 위해 지식경제부와 4개월 동안이나 힘겨루기를 공방을 벌였고, 최근에는 전력구매요금 산정이 잘못됐다면서 같은 공공전력기관인 전력거래소와 8명의 비용평가위원들을 상대로 무려 4조원대 손해배상청구소송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관가에선 김 사장의 이 같은 무리한 행보도 결국 배임논란을 피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김쌍수 전 한전사장이 정부의 반대 때문에 전기료를 올리지 못했음에도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는 이유로 개인주주들로부터 2조8,000억원대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하자, 한전경영진 사이에선 '배임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후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나중에 배임추궁을 피하려면 한전경영진들로선 전기료 인상을 위해 할 만큼 했다는 증거를 남길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공공기관과 개인을 상대로 4조원대 소송을 하겠다는 행위 자체는 잘못됐지만 그 배경 자체는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대 교수는 "경영판단의 합리성 여부는 위법과 합법의 구분이 쉽지 않다"면서 "기업 범죄의 경우 사회질서유지차원에서 형사처벌이 불가피하더라도 경제현실과 법 현실을 고려해 어느 범위까치 처벌 범위를 확대해야 하는 가는 신중히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 처벌 강화 움직임 논란

재벌총수의 배임죄에 대한 형량을 강화해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장에 대해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을 정상화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찬성 측과, "법치주의 근간인 죄형법정주의의 관점에서 배임죄 요건 자체를 구체화하는 게 먼저"라는 반대 측으로 엇갈린다.

좋은기업지배연구소 소장인 김선웅 변호사는 "재벌 총수가 대형 경제범죄로 수백, 수천억의 이득을 챙겨도 법원이 법률상 감경과 작량감경(정상참작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법원이 재량으로 형을 줄이는 것)을 통해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특경가법)상 형을 강화하는 것은 법관의 자의적 재량권 행사를 줄일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마련한 양형 기준이 있지만, 현실에서 '3-5 정찰제'(징역3년, 집행유예5년)란 과거 관행이 되풀이되지 않게 형량 자체를 높여 아예 집행유예가 내려질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자는 얘기다.

반면 법무법인 화우의 차동언 변호사는 "업무상 배임죄는 현재 요건이 너무 추상적"이라며 "배임죄의 구체적 행태들을 명문화 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차 변호사는 또 "포괄적이고 해석의 여지가 많은 건 그대로 둔 채 처벌만 강화하겠다는 정치권의 주장은 역효과 우려뿐 아니라 재벌 총수라는 특정 집단을 타깃으로 한다는 점에서 위헌소지도 있다"고 덧붙였다.

'배임죄 처벌 강화로 투자나 거래 등 그룹 경영 활동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는 재계의 불만에 대해서도 상반된 해석을 내놓았다.

차 변호사는 "계열사 입장이 아닌 그룹 전체 차원에서 시시때때로 급박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총수로서는 (지금처럼 배임죄를 엄격히 적용할 경우) 경영상 제약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차 변호사는 특히 "총수 개인의 착복이 아닌 그룹 전체 가치 제고를 위한 경영적 활동을 계열사별로 떼어 놓고 판단해 배임죄를 묻는다면 기업 활동이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김 변호사는 그러나 "횡령과 배임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며 "대부분의 경우 재벌 총수의 배임죄는 정상적 투자와는 거리가 먼 계열사 확장, 총수 일가 지배력 강화와 관련된 경우였다"고 반박했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 해외에선 어떻게… 獨·日만 배임을 형벌로 다뤄

국내 법체계에서 배임죄는 ▦배임(형법 제355조2항) ▦업무상 횡령ㆍ배임(형법 제356조)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ㆍ배임(특경가법 제3조)으로 나눌 수 있다. 새누리당 내 경제민주화실천모임, 민주통합당에서 재벌 총수 처벌 강화 차원에서 내놓은 '경제민주화'법안은 특경가법 개정안이다.

외국에서 우리나라처럼 배임행위를 형벌로 다루는 곳은 독일과 일본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다른 대부분 나라는 민사적으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 이는 독일이 1851년 배임죄를 프로이센 형법전에 규정한 것이 시초로, 일본을 거쳐 국내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은 ▦적절한 정보에 근거하고 ▦회사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 방법으로 인정될 때에는 배임죄가 아닌 것으로 보는 '경영 판단의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을 두고 있다.

미국은 배임죄를 별개 범죄를 두지 않고 있지만 횡령죄, 금융재산남용죄 등 비슷한 취지를 담은 법안은 있다. 그러나 1892년 루이지애나 대법원 판결 이후 '경영 판단의 원칙'을 확립한 이후 ▦이해관계 없이 독립적이며 ▦상당한 주의의무와 구체적이고 충분한 정보에 근거 ▦재량의 남용 없이 판단하면,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초래했다 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나라는 형법에 명문화된 만큼 배임죄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하다. 다만 경영상 판단에 대한 처벌기준을 보다 합리화하기 위해, 형법에 명문화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경영판단 행위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침해를 받은 대상이 불명확한 탓에 법 적용에 무리가 따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