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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파저란트' 통일된 독일에 남은건 나치즘의 잔재와 지루해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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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파저란트' 통일된 독일에 남은건 나치즘의 잔재와 지루해진 삶

입력
2012.08.3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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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저란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ㆍ김진혜,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발행ㆍ256쪽ㆍ1만2,000원

스위스 태생의 언론인 겸 소설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는 현대 독일어권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다. 단순한 구조, 상투적 성격 묘사, 매체와 상표의 빈번한 인용으로 '독일 팝문학'의 서두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라흐트의 소설 중 처음 국내 출간되는 <파저란트> 는 1995년 데뷔작으로, 독일 통일과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공허해진 삶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가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쥘트 섬,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뮌헨, 란다우, 취리히에서 여러 지인을 만나고 또 그들로부터 달아나 다음 여행지로 향한다. 이 여행이 왜 시작됐는지, 여행 이전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소설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여행의 곳곳에서 주인공은 나치의 모습을 발견한다. 작가는 나치즘을 역사의 우연이 만들어낸 괴물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적인 면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나치즘은 모든 개인의 고유성을 지워버리고 상품의 세계로 획일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재현이다. 때문에 동구권과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에 '나'는 어떤 지향점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부유한다. 사정은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공허와 절망을 위로하는 것은 화려한 상품, 파티, 팝음악, 알코올, 마약, 혼음뿐이다.

얼핏 일본 전공투 세대의 연애를 그린 <상실의 시대> 를 떠올리게 하지만 감성의 결은 사뭇 다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특유의 말랑말랑한 문체로 포스트모던 사회를 섬세하게 은유한다면, 크라흐트는 건조한 시선으로 소비 중심의 현대사회를 꼬집는다. '그는 말했다. 잘 알려진 회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는 것이 모든 도발 중 가장 큰 도발이라고. 그걸로 누구를 도발하려는 것인지 내가 물었고, 그는 좌파들, 나치들, 생태주의자들, 지식인들, 버스 운전사들, 그냥 모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41쪽)

빈번한 상표의 등장과 나치즘 해석 때문에 발표 당시 독일에서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팝문학이라고 하지만, 독일 문학 특유의 건조한 시선과 분위기 때문인지 작품을 읽는 잔재미는 별로 없다. 2008년 작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도 소설가 배수아씨 번역으로 함께 출간됐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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