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점이 다른가. 우리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방식은 사심을 품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방식인 무위이화(無爲而化)의 길이다.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고 자신의 기운을 바로잡아 하늘이 내린 본성에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면 절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게 된다. 서학은 말에 논리가 없고 글에 옳고 그름이 없노라. 사심 없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할 만한 단서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뿐이다. 몸에 수양의 흔적이 없고 배워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니 하느님을 섬긴다는 형식은 있으되 하느님을 섬기는 태도가 아니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여도 진실함이 없도다. 이러할진대 어찌 천지도를 서학과 같다고 하겠는가.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면 누구나 좋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어찌하여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는가. 사람은 제각각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기 마련이니라. 그래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귀천과 고락이 운명으로 주어진다. 누구나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고 누구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는 없도다. 그러나 군자는 기가 바르고 마음이 한결같아서 주어진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천명에 따를 수 있지만 소인은 기가 바르지 않고 마음이 때때로 흔들려서 천지의 명을 거스르고 자연의 이치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주어진 환경에 휘둘리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이요 양심이 없어서 그러한 게 아니니라.
천지도를 비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도는 새로운 생각이다. 예전에도 이러한 생각이 없었고 지금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없어서 견주어볼 데가 없도다. 실제로 수양을 하게 되면 얻는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좋은 결과가 있지만, 수양은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하면 뭔가 있는 듯 여기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노라. 이리하여 우리 도를 비난하는 것이다. 수양해보지 않은 사람만 천지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수양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도 있다. 천지도를 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왜 그러한가.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으려 한다. 왜 그런가. 존중하면서 멀리하는 것이 좋겠다. 떠나는 사람들이라고 함부로 말하여도 안 되고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느니라. 그런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도에 들었다가 어떤 마음으로 도를 떠나는 것인가. 바람 불면 눕고 그치면 일어서는 풀잎처럼 환경과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세태가 이러한데도 그런 이들에게조차 지극한 하늘 기운이 있다고 하는가. 지극한 하늘 기운은 선한 사람에게만 있고 악한 사람에게는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니라. 그렇다면 믿어도 득이 없고 믿지 않아도 해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고대의 성인 요 순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던 때에는 백성들 모두 요 순처럼 선하였다. 세상은 혼자 복 받고 혼자 화를 입는 것이 아니다. 복을 받아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받고 화를 입어도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입는 것이다. 게다가 복을 받느냐 화를 입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 지은 바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해득실을 하나하나 마음과 연관 지어 마음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 해로움이 도리어 자신에게 미치게 된다. 아마 이런 사람들이 복을 누리기는 어렵겠으나 이런 일은 나에게 물을 일도 아니요 내가 관여할 일도 아니노라.
우리 도에서는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참된 것(誠)으로 여기나니 믿을 신(信) 자를 통하여 정성 성(誠)의 의미를 살펴보자. 신(信) 자는 사람 인(人) 자와 말씀 언(言) 자가 합쳐서 이루어진 글자로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니, '말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여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린다'는 의미다. 확신이 들 때까지 거듭거듭 생각하라. 마음에 확신이 서고 나면, 믿지 못할 것과 믿을 것을 확연히 알게 되며 이 같은 방식으로 수양하면 진(眞)과 가(假)를 구별하게 되느니라. 진과 가를 구별하는 척도는 멀리 있지 않으니 '내 마음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곧 참된 것이니라. 사람의 말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으로서 이루어지나니 먼저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밝혀야 성실함을 이룰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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