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을 상대로 씻을 수 없는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적 식민 지배로 인해 우리 민족이 무고하게 희생된 경우는 부지기수이다. 일제가 일으킨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강제 동원됐고, 여성들은 군대 위안부로 끌려갔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인 포로 등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는 등 문명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인간적인 일들을 자행했다.
끊이지 않은 조선인 학살사건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등 관동지역에 강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해 9만여명이 사망하고 4만여명이 행방불명되는 참사가 일어나자 일본 내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고 사회 불안은 극심해졌다. 이에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방화와 약탈, 폭동을 일삼는다'는 유언비어를 유포시킨 뒤 이를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유언비어를 믿은 일본인들은 관동지역에 3,689개의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무려 6,066명의 한국인을 학살했다. 일본 측 책자에도 2,534명이 학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인지 분간하기 위해 일본어를 말하게 한 뒤 발음이 서툰 사람을 무조건 살해했다고 한다.
앞서 1920년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병력을 간도(間島)로 보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 3,469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간도참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 수를 합하면 수만명이 학살됐을 것이란 추정도 나온다. 일각에선 관동대지진 때 2만여명, 간도참변 당시 1만여명이 희생됐다는 통계도 있다.
1919년 3ㆍ1운동 때에도 일제에 의해 7,509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는 1만5,961명이었고 검거자는 5만2,770명에 달했다. 당시 수원 제암리에서는 일본 군경이 기독교도인 30명을 예배당으로 몰아넣고 집중 사격을 가했는데 이 광경을 사진에 담은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일제의 잔학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밖에 천안 아우내, 정주 곽산, 남원 광한루, 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일제는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2차 대전 중 만행 극에 달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일제의 수탈 정책은 극에 달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노동에 동원된 한국인은 최대 146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과 중국 등의 탄광, 금속광산, 군수공장에서 혹사당했으며 '근로 동원'이란 명목으로 초등학생까지 끌려갔다. 1944년에는 징병제도를 실시해 패전 때까진 20만명의 한국 청년들을 전선에 내보냈다.
또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 20만 명을 강제로 징집해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거나 중국과 남양 지방의 전선에 군대 위안부로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부는 강제 동원돼 숨진 한국인은 2만여명이고, 위안부만 6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돼 숨진 한국인에 대한 어떤 보상도 외면하고 있으며 군대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해서는 범죄사실 인정도 거부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은 만주에 주둔하던 731부대에 세균전을 준비하도록 했다. 731부대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9년 동안 한국인, 중국인, 만주인, 몽골인, 러시아인 전쟁포로 등 3,000여명을 대상으로 천인공노할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통나무라는 뜻으로 흔히 '마루타'라고 불린 이들은 산 채로 세균을 투입하는 세균실험이나 혹독한 겨울에 실외에 방치되는 동상 실험의 대상이 됐다. 또 진공실험이나 가스실험, 생체해부 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47년 미국 육군 조사관이 도쿄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731부대에서 만든 인체표본만 해도 페스트 246개, 콜레라 135개, 유행성출혈열 101개 등에 이른다. 이 가운데 한국인이 1,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정원기자 sj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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