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인근 산에다 묻고 돌아와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우리 모녀가 함께 살던 세월이 수십 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인 홀몸이며 더 이상 누구의 딸이 아님을 절실한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아, 내 아기가 먼저 가지 않고 곁에 있었더라면. 문득 이신통이가 나의 전생 아들인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나자, 애틋하고 속상하던 것은 겨울 굴뚝의 저녁 짓는 연기가 북풍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듯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대신 그를 보듬어 쉬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의 손길을 느껴보고 싶어 필사본 책을 들었으나 읽어나가는 중에 점점 빠져들어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가 아니며 홀몸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내가 바로 하늘님이라니!
이 글은 최성묵(崔性黙) 대신사(大神師)께서 직접 쓰시고 말씀하신 것을 최경오(崔敬悟) 신사(神師)께서 외우고 받아쓰게 하여 전해진 것이니라.
나는 경주 사람으로 허송세월하면서 누구네 집 후손이라 구구히 말해야만 남들이 겨우 알아듣는 한미한 집안의 가난뱅이 선비였다. 칠대조 할아버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서 싸우다가 공주 영장으로 경기도 용인 싸움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으며, 이 같은 조상의 음덕을 입어 아버지는 학문을 연마하여 영남 일대에 이름을 널리 알린 선비이셨다. 칠대조 할아버지는 충절로 이름을 떨쳤고 아버지는 학문으로 이름을 남겼으니 이 어찌 나의 복이 아니겠는가.
아아 학자의 삶이란 봄날의 꿈처럼 덧없는 것이런가. 어느덧 나이 사십이 되어 아버지는 과거 공부가 쓸데없는 짓임을 깨닫고 벼슬길을 단념하셨다. 혼탁한 세상을 살며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했던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빌려와 글을 짓고 읊조리셨다. 막대 하나 짚고 나막신 신고 나들이하실 때면 영락없는 산림처사의 행색이셨다. 군자의 모습은 높은 산과 같고 흐르는 강과 같다고 하더니 아버지의 모습이 꼭 그러하셨도다. 아버지가 사시던 곳은 경주 구미산 용담정이니, 기암괴석이 즐비한 구미산은 월성과 금오산의 북쪽에 우뚝하고 아름답게 흐르는 구미산의 용담계곡은 경주 현곡 마룡의 서쪽에 있다. 아버지의 심경을 아는 것인지, 동산에 핀 복사꽃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그 복사꽃처럼 행여 누가 찾아올까 두려워하는 듯하였도다. 강태공이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보냈듯이 아버지는 집 앞 용담계곡의 맑은 물결을 거닐며 세월을 보내셨더라.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뉘라 막을 수 있을 건가. 어느 날 문득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 홀로 이 세상에 남았노라. 내 나이 열일곱에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 아해일 뿐이더니, 아버지께서 평생 써오신 글들도 모두 불에 타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불효를 탄할 뿐 다른 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였다. 혼인을 하고 살림을 꾸려야 했으나 농사도 지을 줄 몰랐으며 과거를 볼 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못하여 점점 빈궁해져서 어찌 살아야 할지 걱정이었다. 열 살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열일곱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더니 삼년상을 마치고 열아홉에 혼인하여 무과나 치를까 하였으니 나는 후실의 자식이라 문과로는 나설 수 없었느니라.
봇짐장수로 십여 년을 떠돌며 세상의 온갖 사람과 풍파를 겪고 사십 가까운 나이에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니 이룬 것 하나 없어 한숨이 절로 났다. 나는 몸 누일 집 한 칸 마련치 못했건만 어느 누가 이 세상이 넓다고 말하는가? 생업은 벌일 때마다 패하여 내 한 몸을 감당하기도 어려웠도다. 기미 시월에 처자식을 데리고 내 고향 경주 용담으로 찾아가니 아버지께서 후학을 가르치며 늙어가시던 곳이었노라. 이듬해 사월에 세상은 저리도 어지럽고 인심은 각박한데 나는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할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간에서는 서양 사람들은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세워져 조화를 부리는 경지에 이른지라 못하는 일이 없고 무기를 들고 나오면 당할 사람이 없다더라는 해괴망측한 말들이 떠돌고 있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거늘 중국이 망하면 이웃 나라인 조선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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