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에 바탕한 베르디의 가극 에서 여주인공 비올레타는 폐결핵으로 죽는다. 푸치니의 가극 의 여주인공인 재봉사 미미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유럽에서 폐결핵이 가장 흔한 치명적 전염병이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유럽 문단과 음악계에 밀려든 낭만주의 물결 속에 가냘픈 몸매와 새하얀 피부, 창백한 얼굴에 때때로 홍조를 띄우는 '폐병 미인'에 대해 느꼈을 연민과 동경의 흔적이기도 하다.
■ 작품 속에서만이 아니라 예술사에 족적을 남긴 수많은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들이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았다. 프레데리크 쇼팽,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에밀리 브론테, 프란츠 카프카, 안톤 체호프 등이 그랬다. 국내에서도 시인 이상과 소설가 김유정ㆍ나도향이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가요계의 전설인'애수의 소야곡'의 남인수, 1970년대 중반 '이름 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 등으로 청춘의 감성을 사로잡았던 김정호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다.
■ 기억도 윤색된다. 세월 속에 빛 바랜 기억을 새로 깨우쳐 일으키다 보면 나중의 경험과 지식이 슬쩍 끼어든다. 한때 '예술가의 병'이라고까지 불렸던 폐결핵으로 숨진 사람들의 예술 작품에서 느껴지는 남다른 비감(悲感)도 끊임없는 윤색이나 보정과 무관하지 않다. 폐결핵이라는 전염병의 예술적, 감성적 이미지를 더듬는 일 또한 오랜 세월의 덧칠하기에 하나를 다시 보태는 것이리라. 대다수 환자는 폐병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할 수조차 없었다.
■ 폐결핵은 기원전 7,000년 경의 신석기시대 화석에서 흔적이 나올 정도로 인류를 괴롭혀온 태고의 질병이다. 1940년대 항생물질인 스트렙토마이신의 개발 이후 위험성 인식이 많이 약화했다. 국내에서는 65년부터 50년 동안의 국가결핵관리사업이 환자를 124만 명에서 16만9,000명으로 줄인 영향이 특히 컸다. 그러나 지금도 연간 3,000명 가까이 목숨을 잃고, 집단감염 소식이 잇따르는 게 국내 현실이고 보면 무관심과 소홀이 결핵균의 약제 내성보다 두렵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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