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 요구를 모조리 포퓰리즘으로 일축해버리는 재계의 태도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다수의 표심을 얻으려는 정당의 계산이 깔려 있는 건 사실이지만, 경제민주화는 이쯤에서 분명 고민하고 토론해야 봐야 할 이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나라에서 대선은 기존 질서와 새 질서, 기존 정책과 새 정책, 기존 주류 이념과 새 대안 이념을 비교 검증 선택하는 주기적인 변곡점이다. 때문에 선거를 앞두고 경제민주화 같은 큰 논의가 진행되는 건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정치인들이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 정략이라고 폄하할 일도 아니고, 설령 각 정당이 경제민주화 얘기를 꺼낸 동기는 썩 순수하지 못하더라도 의제로선 충분히 가치 있다고 본다.
일각에선 '왜 하필 경제가 어려운 시점에 경제민주화냐'고 불만을 늘어놓지만, 어차피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새누리당의 김종인씨가 없었어도, 재벌 딸들이 빵집을 하지 않았어도 경제민주화 논쟁은 피할 수 없었다고 본다.
사실 독재냐 반독재냐의 선거 패러다임은 끝난 뒤로, 쟁점은 언제나 경제였다. 지난 대선에선 성장과 분배가 정면으로 충돌했고 국민들은 '7ㆍ4ㆍ7'의 허황되지만 강한 성장주의를 내세운 이명박 후보를 택했다. 만약 이명박정부가 성장 과실이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지, 왜 제대로 배분되지 않고 있는지, 세심하고 체계적으로 파악했다면 경제민주화 요구가 이렇게 거칠게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민들은 '성장이 저절로 분배를 안겨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중심에 성장 과실이 대기업에 독식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서 경제민주화는 '시대정신'으로까지 승화되는 분위기다.
'경제민주화=반재벌' 심지어 재벌 해체론으로까지 가는 건 좀 과하다고 본다. 일감 몰아주기, 문어발식 확장, 협력업체 옥죄기, 황제경영 등 오랜 구습은 당연히 타파되어야겠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오너와 그룹시스템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건 대단히 비현실적 접근이다. 예컨대 신규 순환출자는 금지하더라도 기존 순환출자 고리까지 강제로 끊으라고 한다거나, 대기업의 제2금융권 계열사 신규소유는 금하더라도 이미 갖고 있는 금융계열사 지분까지 팔도록 하는 건 현실에 기반한 정책이 되기는 어렵다.
이 모든 논의의 뿌리는 그 유명한 헌법 제119조2항, 곧 경제민주화 조항이다. 이 헌법이 만들어진 지 25년이 흘렀고, 그사이 우리나라 경제구조는 강산이 두 번 바뀐 것 이상으로 달라진 만큼, 이 조항 자체의 타당성부터 세부적 실천 방법까지 진지하게 토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2항만 문제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1항과 2항이 입술과 치아(脣齒)의 관계라면, '대한민국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119조1항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따져 봐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 대기업, 중소기업을 망라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정말로 없는 걸까. '천적' 대기업만 없으면 정말로 중소기업들은 번성할 수 있는 걸까. 중소기업과 무관하게 대기업들을 옥죄는 규제와 준조세는 뭘로 설명해야 할까. 구태의연한 행정절차나 공무원들의 위압적 태도, 금융기관들의 이기적인 금융행태는 대기업 보다 더 큰 중소기업들의 적이 아닐까.
단언컨대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119조2항 논의는 한층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결코 포퓰리즘만은 아니며, 충분히 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항만이 아니라 1항도 좀 얘기했으면 한다. 경제력 남용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경제력 자체를 생각해 봐야 한다. 과연 대선주자들이 2항 공약 외에, 1항에 대해선 어떤 생각과 공약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성철 산업부장 sc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