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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영의 덧차원 일기장] 사라진 것과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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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영의 덧차원 일기장] 사라진 것과 남은 것

입력
2012.08.2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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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소설의 거장 중 한 사람인 폴 앤더슨의 타임 패트롤 시리즈는 시간 여행이 가능한 세계에서, 이미 일어난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 활약하는 시간 경찰의 활약을 그리는 소설이다. 시간 여행도 매력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이 소설은 시간 여행과 그에 따르는 인과율의 역설을 즐기기보다는 사건이 일어난 과거 세계를 세세히 묘사하는 데 재미의 중심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과거 세계로 가서 장기적으로 머무르며 그 시대를 연구하고 그 시대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현지 요원이 항상 나온다. 이런 사람들은, 그러니까 일종의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인 셈이다. 자신이 연구하는 그 시대에 직접 가서 몸소 사건을 겪으며 연구하다니,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에게는 꿈같은 일이 아닐까.

현지 요원의 또 다른 사명은 과거에 존재했으되 지금은 사라진 예술품이나 공예품을 수집하거나 기록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보물 같은 것들을 직접 가서 보존하는 셈이다. 물론 함부로 역사를 바꾸면 안 되기에 보물을 직접 가져오지는 못하고 홀로그램으로 기록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미래에서 온 시간 여행자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고 상상해 본다. 시간 여행자는 과학자인 나에게 관심을 가질까.

좀 생각해보니 미래에서 온 사람이 과학자인 나에게 흥미를 느낄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자. 미래에서 과거로 가서 그 시대의 사람을 만날 때, 예술가와 과학자 중 어떤 사람에게 더 관심이 갈까. 대답은 뻔하다. 과학은 발전하면서 이전의 과학을 포괄하거나 수정한다. 더 발전한 과학 지식이 있으면, 예전의 과학 지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시간 여행을 할 정도로 훨씬 더 과학이 발달한 미래인이 과거의 과학자에게 흥미를 느낄 이유가 거의 없다. 과학자의 전문성은 그 시대의 것일 뿐, 세월이 지나면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예술가는 다르다. 물론 예술도 시간에 따라서 발전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예술이 빛을 잃지는 않는다. 누구도 다 빈치의 그림을 옛날 것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예술가의 가치는 그 자신 자체에 있다. 그 가치는 세월이 지난다고 반드시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에서 온 사람에게 과거의 예술가는 여전히 흥미로운 대상일 것이다.

이 상황은 과학의 가치와 예술의 가치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다. 과학은 보편성을 지향한다. 과학 지식은 개개의 사실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보편적으로 모든 구체적인 현상에 적용돼야 한다. 예를 들면 뉴턴의 중력 법칙은 떨어지는 사과부터 시작해서 해와 달, 그리고 온갖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를 통찰한 것이다. 일단 그 한 줄의 방정식이 쓰여지고 나면 이제 이 법칙은 우주의 모든 물체에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러니까 뉴턴의 중력 법칙이라는 과학 이론은 개별적인 현상을 엄청나게 추상화 해놓은 것이다. 과학의 본질은 자연의 추상화에 있다.

예술의 가치는 개별적인 데 있다. 예술가 개인이, 그리고 예술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다. 예술의 가치란 모든 예술에 공통되는 추상적 개념의 가치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술가와 예술 작품 그 자체의 가치다. 그러므로 예술의 본질은 아름다움을 구체적인 형태로 바꾸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보편적인 과학은 그 추상적 본질을 후세대에 남긴다. 미래의 과학은 그때까지 쌓아 올린 전 세대의 토대 위에 서 있다. 그러니까 과학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있다.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그 반대다. 아무리 개별적인 작품과 예술가를 재현하고 승계하고 발전시키더라도, 예술가 자신의 가치는 그가 없으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과학과 예술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과학자는 그의 가치를 후대에 남기기 때문에 그 자신은 더 이상 가치 없는 존재가 되며, 예술가의 가치는 그와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로 남는다. 그래서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가면 과학자보다 예술가를 찾아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강영 건국대 물리학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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