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보통신(IT)산업이 갈라파고스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흔히들 말한다. 외래종의 유입으로 면역력이 약해져 멸종 위기에 처한 갈라파고스 섬의 동물처럼, 일본이 자신만의 표준을 고집하다 세계 시장에서 고립되는 현상을 뜻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홍콩 활동가들의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ㆍ釣魚島) 상륙 등 광복절을 전후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관련한 일본 정치인들의 대응을 보면서 일본인은 역사인식마저 갈라파고스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은 "(일본군) 위안부가 (일본)군에 폭행, 협박을 당해 끌려갔다는 증거가 있다면 한국이 내놓으라"고 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잘못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두고도 "애매한 표현으로 한일 관계를 악화시킨 원흉"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증거를 내놓으라"는 하시모토의 요구는 자기 방어를 위한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일본이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고 강조하는 미국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만들어지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강요된 성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하시모토의 역사인식은 시대착오적이다.
친한파로 알려진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민주당 정조회장은 "덴노(天皇ㆍ일왕)는 국가원수"라고 발언했다. 일본제국 헌법은 일왕을 국가원수로 규정했지만, 현행 일본 헌법상 일왕은 상징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의 역사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24일 가진 긴급기자회견에서 역사 인식의 맥락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법과 정의에 비춰 독도 문제의 결론을 내자며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언뜻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독도와 연관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에둘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교토(京都)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일본에 요구했으나 노다 총리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는데 그쳤다. 노다 총리는 이 대통령의 일왕 사과 요구에 "오히려 이 대통령이 발언을 철회하고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현재 일본 정치는 40, 50대가 주도하는데 이들은 과거 일본이 이웃 국가를 침략해 고통을 끼친 사실을 모르는 세대처럼 보인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 중 유일하게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은 나라이고 관련 역사 교육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 원폭 투하와 패전의 멍에를 짊어 진 피해자로 여기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이들은 매년 8월이면 원폭 투하의 피해를 부각시키며 평화를 강조하는 특집방송을 줄줄이 내보낸다. 반면 선조들이 한국, 중국 등 이웃 국가에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일본이 과거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독도와 센카쿠 문제를 두고 한국과 중국이 지금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쟁 피해자의 아픔은 수십년 아니 수백년이 흘러도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그만큼 고통이 깊다. 외교적 수사가 아닌, 진심 어린 반성과 교육을 통해 주변 국가와의 과거사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는 이상 일본은 앞으로 수십년 아니 수백년이 흘러도 주변 국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립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창만 도쿄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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