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국가의 경제위기가 심해지면서 왕실의 불필요한 씀씀이를 줄이라는 여론의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 세금 보조 없이는 명맥을 유지할 수 없는 유럽 왕실은 이제 돈 한 푼 쓰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지경이다. 제국주의 시절 전세계에 식민지를 경영하며 호사와 사치를 누리던 때를 생각하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24일 "많은 유럽 사람들이 경제난으로 고통을 겪는데 왜 세금으로 왕실의 막대한 지출을 충당해야 하는지 의문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최근 가장 거센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는 곳은 스페인 왕실이다. 경제가 워낙 좋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국민의 존경을 받던 카를로스 국왕 스스로가 지탄을 자초한 면이 크다. 카를로스 국왕은 나라가 구제금융을 받을 지 말 지 갈림길에 섰던 올해 초 아프리카로 코끼리 사냥을 간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국왕의 사위(부마)가 비위 혐의로 조사를 받고, 11세 손자가 실정법을 어기고 총을 가지고 놀다 상처를 입은 사건이 잇달아 터져 비난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스페인 왕실 입장에선 지출을 줄이라는 요구가 억울할 법도 하다. 카를로스 국왕은 지출 통계로 볼 때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 서유럽 국가 중 가장 검소한 군주에 속한다. 왕실이 지난해 받은 보조금은 1,100만~1,230만달러(124억~139억원)로 추정된다. 이는 네덜란드 왕실(4,850만달러)이나 영국 왕실(4,700만달러)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스페인 왕실은 여론을 의식해 국왕 급여를 7% 삭감했고, 매년 여름 거르지 않던 왕실 여름 휴가를 전면 취소했다.
왕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은 다른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올해로 즉위 6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왕실 직원 급여를 동결하고 왕궁 보수 계획을 전면 철회한 데 이어, 일부 왕자와 공주의 경호원을 줄였다. 벨기에 국왕 알베르트 2세는 왕실 예산을 3% 늘린다고 했다가 반대 여론이 비등하자 사비로 지출 증가분을 충당하기로 했다. 베아트리스 네덜란드 여왕은 개인 요트 관리를 해군에 맡긴 것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자 자기 돈으로 관리비를 내기로 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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