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자유의 성소이자 불결함의 낙인도 자못 지운…
페스트, 탄저, 티푸스, 콜레라, 파상풍 등 희대의 살인마들이 실체를 드러낸 게 19세기 중ㆍ후반 무렵이다. 현미경의 발달로 세균학이 비로소 제 이름값을 하게 되면서 저 전염병들의 확산 메커니즘이 과학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 인류는 먼지나 부패한 사채 등 수천 수만 년 동안 너무나 친숙한 환경, 아니면 좀 거슬리긴 해도 적당히 관대할 수 있었던 일상의 불편들이 실은 무자비한 악마였음을 비로소 인식하게 됐다. 물은 가려 마시게 됐고, 의사는 환자를 치료한 뒤 손을 씻기 시작했다. '위생'은 예의나 종교의식(儀式)의 치장이 아니라 생존의 강박적 규범으로, 과학적 시스템으로 자리잡아갔다. 미국 역사학자 조셉 아마토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저 위생 패닉의 시기를 '대청소의 시대'라고 불렀다.
화장실이라는 공간, 엄밀히 말해 배설물과 배설 행위가 위생적으로 통제되기 시작한 것도 대략 그 즈음부터다. 물론 배변의 역사는 생명의 역사와 나란히 이어져왔고, 어떤 형태로든 배변의 공간은 존재해왔고, 야콥 블루메의 저서 <화장실의 역사> 등을 보면 고대 이래 지역별 ㆍ신분별 다양한 배변시설들과 그 변천사를 살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오래된 화장실들이 지금 우리의 관념과 어울리는 최소한의 형식- 사적인 단위 공간과 위생적으로 통제된 처리 시스템-을 동시에 갖추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다. 요컨대 기능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특별해야 할 화장실이 공간적으로 독립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씻는 일상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필수 단위공간으로 포섭된 기간이 100년 남짓에 불과하다는 것은 뜻밖이다. 화장실의>
이는 배설물(그리고 배변행위)이 그 유구한 세월 내내 천시되거나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유럽 여러 나라의 근대 생활사에 이야깃거리로 자주 등장하는 하이힐과 향수의 유래 등을 보면 변과 배변행위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다만 조금 불편한 일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의 도시민들은 길거리 어디서든 용변을 봤고, 그걸 수치로 생각하는 이들은 '이동화장실' 업자를 부르면 됐다고 한다. 간이이동화장실업은 망토와 양동이를 들고 다니면서 용변 보는 동안 가려주는 1인 서비스업으로 19세기 중반까지도 성업했다고 한다. 고대의 어떤 부족은 심지어 신전의 제단에 배설물을 바치기도 했다는 얘기도 <화장실의 역사> 에는 소개돼 있다. 그 때의 배설물은 제 몸의 일부이자 희생제의의 대리물, 신성한 제물이었을 것이다. 특히 농경사회에서 똥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불과 수십 년 전 우리의 농사꾼 부모 세대에게 배변행위는 단순한 '볼일'이 아니라 거름 생산활동이어서 어지간하면 볼일은 반드시 집에서 '봐야 할' 일이었고, 평안도 한 지역 사람들은 정월 초하룻날 부잣집 똥을 훔쳐오는 것을 풍요를 기원하는 풍습으로 이어오기도 했다. 부잣집은 거느린 식솔과 가축이 많기 마련이어서 주변에 모아둔 배설물(퇴비)도 풍성했다. 주인은 그 부피로 자신의 부를 과시했고, 나그네는 그 집 살림의 규모를 가늠했다. 그 경우 똥은 부를 증식하는 생산재이자 풍요의 실증적 자료였다. 화장실의>
똥의 옛 영화는 아직 해몽(解夢)의 사설 속에, 꿈처럼 흔적처럼 남아 있지만, 우리의 관념(감각은 물론이고) 속에서는 이미 혐오ㆍ기피ㆍ수치의 대상으로 자리를 굳혀 왔다. 똥은 저질 저급함의 상징으로, 동서의 흔한 욕설 등 언어 일상 속에서 흔히 발견된다.
하지만 똥의 위신의 급격한 추락은, 거꾸로 그 가치가 이성적으로 재조명되는 과정과 병행했다. 환경 생태학자들의 어떤 메시지 안에서 똥은 생명의 순환을 완성하는 핵심적 조각으로서 신성성을 다시 부여 받는다. 배설(행위)을 혐오해야만 스스로 고상해진다는, 굳어져가는 위선적 관념에 대한 반감으로, 배설(물)을 포용하고 미화하는 것이 집단 관념에 맞서는 성숙한 자아의 척도인 양 옹호되는 경우도 있다. 똥과 배변 행위에 대한, 이러한 정서적 이성적 호의는 문학 작품 속에서 공간(화장실)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희곡 <바알(baal)> 에서 화장실을 겸손과 지혜의 공간이라 했다. 신혼 첫날 밤에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정말 멋진 그 곳에서 우리는 자신이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한낱 인간임을 깨닫게 되고, 육체적으로 휴식하며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곳에서 자네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리라. 뒷간에서- 처먹는 놈이라는 것을!"-( <화장실의 역사> 에서 재인용.) 화장실의> 바알(baal)>
화장실이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공간이라는 데 선뜻 동의할 이는,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는 형이상학적 공간으로 승화시킨 수도승들을 제외한다면, 많지 않을지 모른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도 삼상지학(三上之學)이라 하여 마상(馬上) 침상(寢上)과 함께 측상(厠上)을 책을 읽거나 생각하기 좋은 배움의 장소로 꼽았지만, 그 말 역시 촌음(寸陰)까지 아껴 배움에 힘쓰라는 반어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하루 30분 남짓 머물게 되는 그 '측상'이, 화급한 욕구를 해소하기에 바쁜 현대인에게 그 날의 뉴스와 교양 상식을 보충하는 데 요긴한 장소로 활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화장지가 귀해서 낡은 책이나 신문지로 대용하던 예전이나, 읽을거리가 하도 흔해서 공중화장실 치고 무가지 한 장 없는 곳이 드문 요즈음이나, 우리가 직접적인 생계 활동과 무관하게 지식이나 정보를 전하는 활자를 접하게 되는 드문 공간이 화장실이다.
한때는 그 공간을 '집필'의 장소로 활용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불가사의하게도, 근년 들어 화장실 낙서는 표나게 줄어들었다. 그게 '시민의식 선진화'라는 관급 구호의 효력인지 비정규적 노동자들의 헌신 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 비리도록 고독한 욕망의 대자보들도 화장실에서만 볼 수 있는 읽을거리였다. 화장실 낙서를 동물들의 일반적 습성, 즉 배설물로 제 지위나 힘을 과시하고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기회를 빼앗긴 인간이 그 상실감을 벌충하려는 흔적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를 수긍하든 않든, 화장실 공간과 그 산물에 대해 우리의 무의식에 깔려있는 애착의 탯줄은, 굳이 프로이트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존재론적인 영역에까지 이어져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근래에는 화장실을 실험적인 성 판타지의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이들도 있어 투명 유리문이 달리거나 아예 문을 걷어낸 곳도 있다지만, 상식적으로 그 공간이 '신혼 첫날밤에도 혼자 있을 수 있는' 고독한 공간이란 점은 틀림없다. 고독은 은밀한 누림과 엇갈리듯 겹치는 표현이어서, 저 공간은 번다한 일상 속에서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고 누려야 마땅한 귀한 공간인 것이다. 그 곳은, 첫 자위의 경험처럼, 사춘기 청소년이 성(性)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요긴한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똥에 담긴 저항적 이미지는 위신의 급격한 추락과 화려한 부활의 이력, 천대받는 외양 속에 벼려진 가치 등의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상징적 이미지는 강자에게 맞서는 약자의 무기라는 가외의 쓰임새를 부여했다. 저항의 한 표현으로 누가 누구에게 던져지는 똥은, 그 행위의 구체적 폭력성은 적당히 은폐되면서, 짱돌이 지닐 수 없는 숙연하리만치 강력한 정서적 파급력을 발휘하곤 한다. 1그램 안에 약 1,000억 마리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다는 '생화학 무기'지만 육체나 공간보다는 인격이나 공간 상징과 같은 정신성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실은, 조금 비약하자면, 우리가 그런 효율적인 무기를 내장하고 있고 또 마르고 닳도록 생산해낼 수 있는 역량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준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 또 당분간은 건강하게 살아 갈 것이라는 믿음을 물증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곳이 화장실이라는 것이다.
정형화하기 딱 좋은, 가장 좁고 가장 짧은 연륜의 일상 공간인 화장실이, 집ㆍ공공장소 할 것 없이, 가장 실험적이고 또 가장 공들여 꾸며지는 개성 공간 가운데 한 곳이 됐다는 것은 저간의 사연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화장실이 청결과 불결,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이미지를 제 안에 품음으로써 인간 본질의 미추와 본성의 위선까지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라는 것도 그리 허풍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공부의 궁극에 닿아있는 가치라면, 구양수의 말처럼, 우리는 화장실에서 매일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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