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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범죄 사회가 흔들린다] <1> 왜 '묻지마 범죄'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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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범죄 사회가 흔들린다] <1> 왜 '묻지마 범죄' 인가

입력
2012.08.2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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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죽기 억울" "왜 시비 거나" 여의도·의정부 사건은 사회증오형

지난 18일 의정부 전철역, 21일 수원 정자동 가정집, 22일 서울 여의도 번화가 등 1주일 동안 수도권 곳곳에서 3차례나 이어진 무차별 흉기난동사건은 전례가 없다. 이는 단순히 치안부재나 범죄자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병든 사회의 극단적 단면을 드러낸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한국일보는 패턴화가 우려되는 무차별 범죄의 행태와 원인, 사회구조적 문제와 그 해법을 3회에 걸쳐 심층 분석하기로 했다.

무차별 범죄는 특별한 목적 없이, 불특정 대상을 향해 칼부림, 흉기난동을 벌이는 극단적 폭력행태. 가정과 직장, 사회요인으로 인해 생긴 개인적 분노가 다수의 대중을 향해 극악한 행태의 폭력으로 표출될 위험이 높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근 3차례의 무차별 범죄가 바로 그런 이유로 발생했다.

다수를 향한 증오범죄

"혼자 죽으려니 억울한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복수하려 했다."

22일 퇴근길 여의도 칼부림으로 전 직장동료와 행인 등 4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신용평가회사 전 직원 김모(30)씨는 범행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퇴사 후 재취업에도 실패, 신용불량자가 된 김씨는 자신의 불행을 전 직장동료 탓으로 돌렸고 수 십 명의 행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사였던 김모(32)씨와 동료 조모(31)씨를 25㎝ 과도로 각각 4, 3차례 찔렀다. 특히 자신과 아무런 원한관계가 없는 행인 안모(32ㆍ여)씨까지 어깨 등에 4차례나 찌른 것은 개인의 분노와 증오심을 사회 구성원을 향해 표출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지난 18일 오후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에서 유모(39)씨는 침을 뱉는 과정에서 일어난 승객과의 시비에 길이 24㎝의 공업용 커터칼로 승강장과 전철역을 오가며 무려 8명의 승객과 행인에게 휘둘렀다. 일용직 노동자인 유씨는 일자리를 잃은 데 대한 개인적 사회적 불만을 이렇게 표출했다. 19일 인천 부평시장 골목에서 쇠파이프까지 휘두르며 최모(26)씨 등 여성 3명을 폭행, 코뼈와 이빨을 부러뜨린 김모(24), 이모(25)씨는 범행 이유에 대해 "이들이 확 밀치고 지나가 홧김에 때렸다"고 말했다. 사소한 시비에도 극단적 폭력을 행사할 만큼 불안정한 심리를 보였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여의도나 의정부역 사건은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증오범죄의 한국적 형태"라며 "해고 등 개인적 불행과 실패를 직장과 사회로 돌려 무차별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흉악범죄 부르는 사회단절형

서울 광진구에서 30대 주부를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서모(32)씨는 성폭행 시도 과정에 저항을 받자 이 주부에게 셀 수도 없을 정도로 폭력을 행사했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장기가 손상될 정도였다. 사망원인이 두 차례 찌른 칼 때문인지 폭력행사 때문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서씨는 검거된 뒤 경찰에서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따돌림이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20년 전 단기사병 복무 중 성폭행을 저질러 사법 처리된 뒤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또 다른 성폭행 사건으로 지난 2월 출소한 뒤 전자발찌를 차고 사회생활을 했지만 실제로는 사회에서 고립된 외톨이였다. 서씨는 담당 보호관찰관에게 "전자발찌를 차고는 아무도 못 만나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직장에서 벗어나면 줄곧 컴퓨터에만 매달려 살았다. 여의도 흉기난동 사건 범인 김씨도 4년간 연락을 끊고 살았다. 김지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립된 인간관계는 범죄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며 "성 범죄자들은 자신이 받은 형량과 더불어 사회적 차별이라는 이중처벌을 받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목적없는 칼부림

"느낌대로 갔다" "끌리는 대로 했다"

23일 울산 중구 한 슈퍼마켓. 한 20대 남성은 아무런 목적 없이 칼을 휘둘렀다. 이 남성은 주인과 원한관계도 없었고 돈도 훔치지 않았다. 범죄행위에 이유가 없었다. 2010년 9월 발생한 서울 신정동 옥탑방 부부살인사건. 묻지마 살인사건의 대표적 사례다. 일용노동자인 범인 윤씨는 당시 "가족의 웃음소리가 불쾌해 무작정 올라가 둔기를 휘둘렀다"고 말했다. 13일 부산 호프집 주인 최모(55)씨, 종업원 송모(56ㆍ여)씨에게 흉기를 휘둘러 살해한 일용직 근로자 신모(43)씨는 범행동기를 묻는 경찰에게 그저 "그들이 나를 무시했다"고 답했다.

황승흠 국민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최근 벌어진 무차별 범죄의 공통점은 '고립ㆍ소외ㆍ자포자기'로 꼽을 수 있다"며 "기본적인 안전망인 가족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2차 안전망인 사회도 그 역할을 못하고 있어 무차별 범죄가 빈번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김현빈기자 hbkim@hk.co.kr

■ 日 '길거리 악마' 단어 생길만큼 흔해… 美도 총기 난사 끊임없어

2008년 6월 8일 낮 일본 최대 전자상가거리인 도쿄 아키하바라에 화물차 한 대가 돌진했다. 차에서 내린 가토 도모히로(당시 26)는 시민과 경찰에게 흉기를 마구 휘둘러 7명이 숨지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 범인은 해고된 비정규직 근로자였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세상이 싫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왔고,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범행동기는 일본 사회를 공포로 물들였다.

무차별범죄는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1980년대부터 무차별 범죄가 사회문제로 대두한 일본에서는 이런 유형의 범죄를 마물에 빗대 '도리마(通り魔ㆍ길거리 악마)'라고 부른다.

도모히로가 저지른 '아키하바라 살인사건' 이외에도 사망자 5명에 부상자 10명이 발생한 1999년 9월의 시모노세키 차량 폭주 사건, 초등학생 8명이 무참히 살해당한 2001년 6월의 오사카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 3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한 2005년 4월의 센다이 트럭폭주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올해 6월 10일 이소히 교조(36)가 오사카 히가시신사이바시 번화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음악 프로듀서(42)와 음식점 업주(60)를 흉기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도 도리마 사건이다. 교조는 "사형을 받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혀 또 한번 일본에 충격을 안겼다.

총기소지가 허용된 미국에서는 무차별 총기 난사로 무고한 시민이 숱하게 희생됐다.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이 숨진 1999년 4월 컬럼바인 고등학교 사건, 여학생 14명이 살해된 2006년 10월 웨스트 니켈 마인스 학교 사건, 한국계 조승희가 32명을 살해한 2007년 4월 버지니아 공대 사건 등을 비롯해 지난달 12명이 숨진 콜로라도 총기난사까지 대형참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 사회서 낙오·가족 붕괴… 희망이 없어서

지난 21일 수원에서 술집 여주인 성폭행 실패 후 마구잡이로 흉기를 휘둘러 1명을 살해하고 4명을 다치게 한 강모(39)씨는 출소한 지 한 달여 만에 또 다시 범행을 저질렀다. 강씨는 H주점에서 여주인 등을 흉기로 찌른 후 경찰과 택시 기사에게 쫓겨 금방 붙잡힐 상황이었지만 가정집에 들어가 또다시 흉기를 휘둘렀다. 강씨는 23일"나는 어차피 사형을 받을 것이다. 자포자기했다"며 이날 예정된 영장실질심사와 현장검증을 거부했다.

지난 22일 저녁 전 직장동료 2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두른 김모(30)씨 역시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범행 후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했지만 자포자기 심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사무실 건물이 밀집한 범행현장은 퇴근시간을 맞아 행인이 가득했고 불과 50m 거리에는 새누리당 당사를 지키는 전경 1개 중대가 배치돼 있었다.

앞서 지난 21일 서울에서 가정주부를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서모(42)씨는 전자발찌를 찬 채 범행을 저질렀다. 서씨는 "잡히면 교도소에 가고 안 잡히면 그만이라는 심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최근 잇따라 발생한 무차별적인 흉기난동 범행들은 피의자들이 한결같이 제대로 된 직장이 없거나 가족 관계가 소원한 소외계층으로, 범행 후 경찰에 붙잡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포자기 심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미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공감이나 죄책감을 갖지 않는 상태로 몰입한다. 동시에 내재된 분노와 감정을 폭발시킴으로써 일시적 성취감을 얻는'극단적인 화풀이 본능'을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민대 법대 황승흠 교수는 이런 자포자기형 범죄가 잇따르고 있는 이유로'가족의 붕괴'를 꼽았다. 황 교수는 "이들은 심한 소외ㆍ고립감을 느끼며 밀접한 가족이라든가 사회적 연대감이 없다 보니 사회 규범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 죄책감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사회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인 가족과 가정이 IMF 이후 붕괴 경계선상에 놓여있다"며 "그 부족함을 국가와 사회가 메워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내재된 고립ㆍ소외감이 곪아 터지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동국대 이윤호 교수는"외톨이이거나 은둔형이면서 사회적 낙오자들은 대부분 심적으로 희망이 박탈된 상태"라며 "이들이 힘으로 이길 수 있는 대상은 여성이거나 노약자들이어서 이들을 대상으로 무작위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수원=김기중기자 k2j@hk.co.kr

김현빈기자 hbkim@hk.co.kr

■ 여의도 무차별 칼부림

22일 여의도 퇴근길을 핏빛으로 물들인 김모(30)씨는 생활고와 개인적 실패를 전 직장동료 탓으로 여기고 전 직장동료 6명을 살해할 마음으로 무차별 칼부림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여의도 흉기난동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23일 "김씨가 자신이 다니던 A신용평가정보회사를 그만두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뒤 최근 모 통신회사 재취업도 실패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며 "이에 김씨가 자신을 험담한 A사 직원 6명을 살해하기로 결심했다는 진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씨는 월세 20만원 신림동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과도(5개)와 숫돌을 구입해 칼날을 갈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는 전 직장동료 외에 행인들을 찌른 이유에 대해 "나를 잡으려고 쫓아오는 것 같았다. 두 분께 죄송하지만 어제 집 밖으로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전 직장동료도 아닌 행인 안모(32ㆍ여)씨를 어깨 등 무려 4차례나 찔렀다. 범인 김씨는 A사 퇴사 이후 신용불량자 전락에 재취업 실패 등 개인적 불행이 닥치자 이를 전 직장인 A사의 동료들 탓으로 여겼고 극단적인 피해의식과 증오심을 키워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 2년제 대학을 중퇴한 범인 김씨는 2007년부터 지난 4월까지 모두 회사 4곳을 다녔다. 모두 비정규직이다. S휴대폰 미납관리팀, S보증보험 신용채권관리팀, A신용평가정보회사 휴대폰미납팀, J은행 대출영업위탁회사를 전전했다.

김씨는 2009년 10월 세 번째로 입사한 A사에서 나름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휴대폰미납금을 받는 계약직이었지만 3개월 만에 부팀장으로 승진했다. 수입도 안정적이었다. 실적에 따라서 개인차가 있었지만 기본급이 있어 월 150만~200만원을 고정적으로 벌었다. 하지만 입사 1년여만인 2010년 10월 퇴사했다. 김씨는 경찰조사에서 "동료들이 '제 앞가림도 못한다. 실적도 없으면서 부팀장이라 월급만 많이 받아간다'고 험담해 스스로 그만뒀다"고 진술했다.

회사를 그만 둔 김씨는 지난해 3월부터 J은행 대출영업위탁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했지만 실적이 좋지 않아 역시 오래 다니지 못했다. 기본급 없이 철저히 실적으로 월급을 지급하는 체제여서 수입이 전혀 없는 달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곤란해지자 고시원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김씨가 살던 고시원 주인은 "방세가 한 달 밀렸다"고 했다. 김씨는 결국 4,000만원의 빚만 떠안고 지난 4월 직장을 다시 그만뒀다. 최근 노트북도 팔 정도로 생활고를 겪던 그의 지갑에는 체포 당시 200원과 4,000원이 충전된 교통카드만 들어있었다.

김씨는 경찰에서 "일을 그만두고 두, 세달 전부터 삶의 의욕을 잃었다. 내가 근무하던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했는데 혼자 죽으려니 억울했다"며 "이렇게 된 데는 내 잘못도 있지만 주변에서 나를 힘들게 한 부분도 있어 그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살의를 느낄 때마다 구입한 과도 5개 가운데 범행 당시 2개를 사용했다. 김씨는 7㎡ 크기의 고시원 방 안 냉장고에 과도의 바코드 딱지를 붙일 정도로 원한에 집착했다. 하지만 범인 김씨로부터 칼부림을 당한 전 직장상사 김모(32)씨는 "우리 집에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한 적도 있다. 와이프도 그 사람을 안다"며 "험담을 했다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2년 전 회사를 그만두더니 그 동안 연락 한 번 한 적 없었다"고 경찰에 말했다. 김씨의 전 직장동료 탓이 정신병적인 피해의식일 가능성도 있는 대목이다.

김씨는 가족과도 4년 전부터 연락을 끊었고, 20대 초반부터 홀로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또 10년 전 여자친구를 한 번 사귄 것 이외에는 이성교제도 하지 않았다. 김씨의 어머니는 경찰의 전화가 올 때까지 아들의 범행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가 살던 고시원 이웃들도 김씨를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김씨와 같은 층에 살던 김모(25)씨는 "지난주 씻으러 가다가 처음 봤다. 만취해 행패를 부린 적도 없다"고 말했다. 옆방에 살던 양모(42)씨는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김씨 역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른 여느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고립돼 분노만 키워온 외톨이 시한폭탄이었다.

경찰은 23일 김씨에 대해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송옥진 기자 click@hk.co.kr

■ 범인 추격했던 이각수 명지대 교수

"범인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 제대로 걷어 찼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피해자가 위독하다던데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22일 저녁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4명을 찌른 범인 김모(30)씨를 뒤쫓았던 용감한 시민 이각수(51ㆍ명지대 사회교육원 무예과) 교수와 계진성(41ㆍ새누리당 중앙청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씨는 오히려 범인을 더 일찍 진압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23일 오전 10시쯤 사건 발생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한 일을 했다'는 말에 "사람이 다쳐 좋은 일도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새벽 2시 넘어서까지 경찰서에서 목격자 진술을 하느라 피곤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사건이 일어난 22일 오후 7시쯤 빵집의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1990년 이종격투기 세계챔피언을 지내고 현재 세계종합격투기연맹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이 교수와 역시 무술 유단자인 계씨가 10월에 열릴 세계종합격투기대회 장소 섭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

저녁 식사를 위해 빵집 맞은 편에 주차한 차를 타려는 순간 남자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범인 김씨가 찌른 전 직장 상사 김모(32)씨의 비명이었다. 김씨와 함께 걸어가던 전 직장 동료 조모(31·여)씨는 이미 수차례 찔린 뒤였다. 이 교수는 "돌아보니 여자가 쓰러져 있어 '괜찮냐'며 부축했다"며 "남자가 피를 흘리며 도망가는데 범인이 뒤쫓았다"고 말했다.

계씨는 범인이 칼을 휘두르기 직전 조씨와 김씨를 향해 걸어가던 모습을 기억했다. 그는 "오른손에 칼을 쥐고 있었던 것인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주변에 있는 행인들도 비명을 들을 때까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부상이 심한 조씨 곁에 있던 이 교수는 시민들의 저항에 놀란 범인이 방향을 틀어 빵집 쪽으로 다시 뛰어오자 앞을 가로막고 발로 찼다. 그러나 범인 김씨는 이를 피해 조씨를 한 차례 더 찔렀고, 다시 찌르려던 순간 이 교수가 범인의 복부를 오른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이 교수는 "여자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해칠 것 같아 '죽더라도 잡아야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쓰러졌던 범인 김씨는 칼을 쥔 채 다시 일어서 국회대로 방향으로 달렸다. 두 사람도 뒤를 쫓았다. 범인은 지나가던 남자와 여자를 차례로 찔렀다. 신음소리를 내고 쓰러지는 남자를 이 교수가 부축했다. 계씨는 윗옷을 벗어 어깨를 찔린 여성 안모씨를 부축했다. 안씨는 "저 어디 찔렸어요"라며 불안에 떨었고, 계씨는 "조금 그였을 뿐이고 구급차 오니까 마음 편히 먹으라"고 진정시켰다. 계씨는 "그런 상황이라면 놀라거나 겁나서 칼을 버리고 도망갈 텐데 칼을 들고 뛸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범인을 추격한 이 교수는 다른 시민 김모씨와 함께 막다른 골목으로 도망친 범인과 대치했고 잠시 후 경찰이 출동해 범인을 붙잡았다. 합기도 8단 등 무술단수만 도합 28단인 이 교수는 10여 년 전쯤 베트남에서 열린 이종격투기대회에 참가했을 당시에도 칼을 휘두르는 인력거 운전자를 제압한 일이 있었다.

경찰은 범인 검거와 피해자 구조에 앞장선 이 교수와 계씨, 또 다른 시민 김씨를 표창하겠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이라며 "포상금을 받으면 피해자 치료에 보태겠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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