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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좋은 말'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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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좋은 말' 도둑

입력
2012.08.2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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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성 빼면 시체인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무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할 말 없으나 '스텝업4'를 보러 갔다가 영 찜찜해져 나왔다. 채닝 테이텀이 출연했던 때부터 굉장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시리즈는 아니더라도 역동하는 젊은 육체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을 사심 없이 감상하기에는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끼 밥값을 뛰어넘는 돈을 내고 영화표를 산 거였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면 야동이라도 상관없겠으나 '스텝업'을 택한 이유는 이 시리즈가 젊은이들과 댄스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공유하지 않더라도 춤이라는 것은 눈에서 심장으로 아름다움과 쾌감이 직격하니 얼마나 고맙고 간소한 즐길거리인가. '칼군무'라고 불리며 딱딱 맞아떨어지는 댄스그룹의 소년 소녀들이 그토록 사랑을 받는 이유도 불과 몇 분 동안 그런 순간을 보는 이에게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99% 운동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듯한 스토리를 보는 내내 좀 불쾌했다. 흰색, 갈색, 흑색, 황색 등 색깔은 각기 달라도 골고루 윤기 있고 아름다운 댄서들의 육신에 대한 순수한 경탄까지 망그러뜨리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인데, 원작과 다른 것은 로미오가 가난뱅이라는 것이다. 로미오는 우리로 치면 재개발 지역에 사는 좀 데데한 청춘이다. 춤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긴 하지만 현실은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하루하루 먹고 살고 있다. 그래도 춤이 있고 고된 일이 끝나면 한바탕 춤추며 즐길 수 있으니 버티고 있다. 여주인공은 그런 가난한 로미오의 일자리를 한번에 뺏을 수 있는 자본가의 딸이다. 실제로 그녀의 아버지는 일을 허투루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주인공의 좀 껄렁한 동생을 단칼에 해고한다. 처음에 폭발하는 춤의 에너지를 즐기기만 하던 주인공과 그 일행은 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다가, '시위 예술'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유튜브의 순위에 올라 유명해지고 싶지만, 단순한 사고뭉치이기만 해서는 비전이 없다며 여주인공의 냉철한 충고에 따라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세상에, 요즘 부잣집 애들은 교양이 있어서 이런 것도 먼저 안다. 정작 자본가에게 해고당한 당사자이므로 여주인공의 아버지를 향해 짱돌을 들어야 할 것 같은 주인공의 남동생은 그런 생각을 해낼 재주가 없다. 다행히 그들의 시위 예술에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데,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구질구질한 동네 땅을 죄다 사서 싹 밀어버리고 명품과 호화 리조트로 가득한 파라다이스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때문이다. 물론 그 동네는 주인공이 춤을 추는 오래된 동네 바, 주인공의 누나가 일하는 허름한 사무실처럼 우리네 이웃 삶의 터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주인공의 아버지는 악덕 자본가답게 도시 경관을 해치는 그런 동네를 없애고 호화 리조트를 만드는 것이 미덕이라고 딸의 호소를 일축한다.

여차저차, 결론은 물론 이런 영화가 그렇듯이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행사장에 왔던 시장은 수준 높은 '시위 예술'에 감동하고, 일류 마케터는 나이키 광고를 맡고 있는데 너희처럼 독창적인 예술가를 찾고 있다며 손을 내민다. 모두 행복하다. 흥 여기가 서울이라면 시위 예술의 시옷자도 꺼내기 전에 컨택터스에게 박살이 나서 춤출 관절도 성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영화관을 나오다가 불쾌감의 근원을 알았다. 왜 이렇게 우리는, 없는 사람들은 착한 부자를 믿고 싶어할까.

악덕 자본가의 개과천선, 유력 자본가 딸과의 사랑이라는 연줄, 제 3세계를 착취하는 글로벌 기업과의 거래, 영화에서 가진 것 없는 젊은 예술가들을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처럼 구원해 주는 것은 결국 착하고 힘센 부자가 개과천선해 우리 편이 된다는 참담한 환상 혹은 망상이다. 창의, 가족, 도전처럼 좋은 말을 자본이 슬슬 가져가면서 그런 착각이 깊어졌다. 이제는 사회공헌, 나눔, 이런 단어도 가져가서 망원시장 근처에 떡하니 들어서는 마트가 생기는 아파트 이름은 '메세나폴리스'라고 한다. 좋은 말은 힘센 놈들이 다 가져간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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