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통과 백화가 언제쯤 한 몸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대개 한양 연희패와 헤어져 천안 객점에 머물던 시기였을 것이다. 주변 고을에 살면서 그들의 공연을 구경했던 사람들은 모두 백화가 발탈놀음 재담꾼 신통이의 아내라고 알고 있었다. 박돌의 기억에 의하면 이신통이 그 무렵에 심한 고뿔에 걸려 인사불성이 되었을 적에 백화는 놀이판에도 나오지 않고 읍내 의원에서 약을 지어다 달여 먹이며 정성껏 보살펴 주었는데 그 뒤부터 정말 부부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들은 전주에 거처를 정해 놓고 박돌이가 모아온 악사 소리꾼들과 함께 남도지방을 돌아다녔다. 박돌이 남도에서는 못 보던 발탈놀음을 놀아보자 하여 이신통이 잽이를 하고 박돌과 젊은 광대가 발탈을 놀면서 서로 맞추어 보았다. 재담을 주고받는 중에 나오는 고을의 풍속이며 지리는 모두 남도 색으로 바꿨고 중간에 끼어드는 잡가 타령들도 거의 판소리 단가나 남도 민요를 끼워 넣었다. 백화는 여전히 경서도 소리를 고집했지만 한양에서도 부르던 남도 단가들을 호남 소리꾼들과 함께 연습하며 차츰 판소리에 젖어들게 되었다. 그 무렵에 이신통은 기왕에 전해오던 해서지방의 민담과 놀이를 엮어서 노중 객사한 유랑민의 주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과부의 장례놀이를 소리 대본으로 만들었고, 수원 지방에서 전해 오는 고집쟁이 부자의 변신 설화를 엮어냈지만 거기에 소리를 붙여내지는 못했다.
신통과 백화는 박돌이네 패거리와 일 년여를 호남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중에 신통은 가락과 장단에 귀가 틔었고 백화는 이전에 판소리의 단가를 몇 구절씩 부르다가 춘향가와 심청가를 완창하게 되고 사설을 풀어 전하는 아니리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는 몸짓인 발림에 이르기까지 습득할 수 있었다. 박돌은 자기 연희패와 동행했던 수많은 소리꾼들과 공연하는 사이에 차츰 그들의 재간을 자기 것으로 새롭게 만들었던 백화의 자질을 보고 비단에 쪽물 들이는 것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이미 호남지방에서 시작된 판소리가 산과 물을 건너 영남으로 건너가고 호서지방으로 그리고 한양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판소리는 상민에서 양반에 이르기까지 즐기는 이들이 많아서 사대부의 잔치 자리에도 불려갔다. 지방 관아에서 정월대보름 단오 백중 한가위 동지 등의 축제나 행사를 기획하는 것은 거의가 아전들이었는데, 이들은 모시고 있는 사또 수령들의 은근한 요청에 따라 명창으로 이름난 이들을 불러다 치르기 마련이었다.
해마다 동지 무렵에 전주 관아를 중심으로 열리는 대사습(大私習)놀이는 해마다 소리꾼들이 기량을 뽐내는 자리가 되었는데 이들을 모으는 일은 감영(監營)과 부(府)의 아전들이 맡았고 수리인 이방이 총괄했다. 관찰사가 있는 감영이 상급 관아였으나 전주 부는 향소의 일을 더욱 자세히 꿰고 있어 역시 부에서 모아온 소리꾼들이 경연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백화가 몇 차례 아전들 자리에 나아가 시연을 하고서 놀이에 참여할 수가 있었고 박돌의 권유로 이신통이 고수를 잡았다. 백화는 여느 때처럼 갓 쓰고 도포 입은 남장 차림으로 마당에 나아가 춘향가 중의 몇 대목을 불렀는데 청중은 처음 대하는 여창에 모두들 놀라고 신기하게 여기던 것이었다. 백화가 제아무리 타고난 소리꾼이오 한양에서 갈고 닦은 재간이 있다하나 경연의 본선에 참가한 이들은 수십 년 동안 소리를 연마한 중년의 예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남자들이었고 예선에서 시연한 여창 백화는 청중들에게 신선하고 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때에 심사를 보았던 선생들 가운데 부안 손동리 귀명창이 있었고, 그는 나중에 사람을 숙소로 보내어 소리꾼 심백화와 고수 이신통 그리고 패거리의 물주였던 박돌을 저녁 술자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손 선생이 백화의 소리에 대하여 자신의 느낌을 말하였다.
경서도 소리를 해왔으면서도 목청이 수리성으로 간드러지지 않고 힘이 있으며 애잔하다. 그렇지만 아직은 소리에 그늘이 없고 깨벗어서 지나치게 맑고 아름답구나. 뭔가 꼭 집어낼 수는 없으나 애잔함이 있으니 거기에 깊이를 터득해야 득음(得音)을 하게 된다. 깊은 가슴 속, 저 아래 잠긴 물을 길어 올리는 것과 같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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