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 아니 있을 수가 없었다. '박근혜 사당화' 논란을 무릅쓰고 1인 지배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몽니 부리는 비박 주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추대식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어제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박 후보는 절대적 표차로 대통령후보에 선출됐다. 12월19일 대선까지 120일 남았다. 지나간 모든 것은 서막에 불과하다. 지금부터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대선고지를 향해 뛰어야 한다. 대권을 거머쥐기 위해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보인다. 밖에선 또렷하게 보인다. 그러나 안에선 보지 못한다. 아니 보지 않으려고 든다. 진실의 민낯을 보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선의의 충고도 적대적 비난으로 몰아붙인다. 안타까움의 쓴 소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잠꼬대로 치부한다.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그저 입에 착 달라붙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서 샴페인 터뜨릴 생각에 여념 없다. 앞으로 5년을 어떻게 보낼까 한 여름 밤 꿈꾸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하지만 여차하면 일장춘몽으로 몰고 갈 함정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박근혜가 바뀌어야 한다. 대통령으로 5년 동안 국가를 경영하려면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소신과 원칙의 이름으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채워진 부분을 비워야 한다. 먼저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 박근혜의 계영배(戒盈杯) 철학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모두 사라진다는 '절제의 미학' 말이다. 그러나 대통령후보에 이르는 여정은 평소 그 답지 않게 강박증에 빠져 '가득 채움'으로 점철됐다. 가득 채워진 자신을 비우지 못하면 국민들의 마음이 들어설 곳은 없다.
'박정희와 육영수의 그림자'를 비워야 한다. 15일 육영수 여사 기일을 계기로 박근혜는 육영수마케팅에 나섰다. 5ㆍ16 쿠데타에 대한 역사관, 유신에 대한 평가 등 공격의 화살이 박정희 시대로 쏠리자 육 여사로 대응하는 형국이다. 착각이다. 20~40대, 박근혜가 집중 공략해야 할 그 세대는 육영수 여사를 잘 모른다. 40년 전의 어머니 꿈을 이제 와서 이루겠다고 해선 뜬금없는 얘기로 들린다. 최악의 한일관계에 비춰볼 때 반일정서가 이번 대선을 휘감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박 대통령의 친일 논란이 박근혜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부모를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를 구분해서 대응하라는 뜻이다.
사람에 대한 불신을 버려야 한다.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과 연결된 측근들의 배신과 유신시대 인사들의 배덕에 대한 트라우마를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극소수 측근들과 그 사람이 그 사람인 용인(用人)으로는 불통과 독선의 이미지를 벗어 던질 수 없다. 옹치봉후(雍齒封候),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주변을 추스르는 포용력을 보여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본진을 허술하게 해 놓고 적을 격파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지나친 자신감, 자만을 버려야 한다. 퍼스트레이디 5년, 당 대표 2년의 경험으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이번 경선을 앞두고 박근혜 캠프는 이벤트가 아니라 정책으로 감동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한 달 간의 경선을 거치며 박근혜의 어떤 비전과 정책이 국민들에게 작으나마 감동을 주었는지 알 길이 없다. 후보자 본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백화점식 정책공약보다는 시대정신과 함께 호흡하는 비전과 실천을 보여주어야 한다.
진정 보통사람이 되어야 한다. 비운의 공주에 대한 동정과 특권계급에 대한 경외심은 사라진 지 오래다. 빨리 국민들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대통령보다 더 대통령 같은 박근혜는 딴 나라 사람으로 느껴질 뿐이다. 2004년 총선 때도 유권자들은 보통사람으로 돌아온 박근혜를 보고 한나라당에게 기회를 줬다. 대통령을 나라님으로 모시던 시대는 지나갔다. 국민이 채용하는 5년짜리 고용사장으로 생각할 뿐이다. 이기려면 바뀌어야 하고, 바뀌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
황태순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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