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긴 시각, 홈쇼핑채널 CJ오쇼핑의 콜센터. 심야 여성 속옷 판매 방송이 나가면서 주문전화 벨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상담사 김 모씨가 전화를 받자마자 남성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김 씨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속옷소재를 묻던 남성은 대뜸 "지금 그 속옷을 입고 있나, 사이즈가 어떻게 되나, 비치냐"고 물었다. "더 이상 통화를 할 수 없다"며 전화를 끊은 김 씨는 "올해 3년째 근무하지만 이런 전화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성속옷 방송에 걸려오는 남성전화는 십중팔구 이런 성희롱 전화라고 한다.
김 씨의 경우는 약과다. 114 전화번호 안내를 하는 KTIS의 상담원 김 모씨는 가끔 성매매업소 연락처를 묻는 전화를 받는다고 했다. 김 씨는 "알려줄 수 없다고 했더니 그럼 당신이라도 와라, 오지 않으면 찾아가서 당신 몸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했더라. 너무 수치스럽고 분해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고 진저리 쳤다.
음성노동자. 쉽게 말해 전화 받는 직업이다. 사무실에 앉아 전화 받는 일이 뭐 힘드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의 업무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전국의 음성노동자는 2009년 기준 3만5,000개 업체에 걸쳐 약 80만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쉽게 답하기 힘든 난감한 질문부터 욕설, 성희롱 등 온갖 언어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KTIS에 따르면 114 상담원들은 월평균 1,700여건의 폭언, 성희롱, 협박 등 악성전화에 시달린다. 악성전화 유형으로는 폭언 및 욕설이 796건(45.6%)으로 가장 많고,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426건), 장난전화(428건), 성희롱(96건) 순이다.
음성노동자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보니, 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성희롱이다. 노골적인 음담패설을 비롯해, 신음 소리를 내거나 심지어 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한다. KTIS의 박 모 상담원은 최근 차마 글로 옮기기 힘들 만큼 심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말로 성희롱을 당했다고 했다. 그는 "이젠 이골이 날 때도 됐지만 이번엔 정말로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워 남편 얼굴을 쳐다보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심한 욕설과 함께 가족까지 들먹이는 인격 모독성 발언, "찾아가서 죽이겠다"는 협박 전화도 심심찮게 받는다. 이유 없이 상담원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황당하고 난감한 질문도 상담원들을 곤란하게 한다. CJ오쇼핑의 10년차 상담원 이 모씨는 "어떤 색깔의 옷이 더 잘 어울리겠냐는 질문부터 카시트에 방귀를 뀌면 냄새가 배느냐는 질문까지 어이없고 황당한 질문들이 많다"고 애환을 털어 놓았다.
음성노동자들을 향한 언어폭력은 '그냥 참아라'라고 하기엔 도를 넘어섰다는 게 이쪽 업계의 얘기다. 상담원 개인들의 지혜와 인내에 맡길 수만은 없으며 뭔가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KTIS는 114 상담원들을 괴롭히는 상습 악성고객을 찾아내 고소ㆍ고발키로 했다.
또 민원인을 상대하는 고객상담팀도 발족시켰다. 이 곳을 찾아오는 민원인들은 상담원들의 실수 때문에 화가 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황당한 경우들이다. 예컨대 상점 주인이 원치 않아 전화번호를 등록하지 않으면 전화번호를 안내할 방법이 없는데도 상담원이 전화번호가 나와있지 않다고 안내하면 욕설을 퍼붓는 경우다. 알려준 전화번호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떼를 쓰기도 하고, 칼이나 수면제를 들고 있으니 상담원이 해결해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엄포를 놓는 경우도 있다.
과중한 스트레스에 비해 열악한 처우도 음성 노동자들을 힘들게 한다. 전체 콜센터 상담원의 월평균 임금은 134만2,000원으로, 전체 산업 평균의 70%에 불과하다. 그렇다 보니 일을 오래 하는 사람이 드물다. 콜센터 상담원들의 근속 기간은 평균 3.1년으로 전 산업 평균의 3분의1에 머물고 있다.
그만큼 상담원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보니 KTIS는 이들을 위해 휴게실을 따로 마련했다. 여기서 상담원들은 40분 근무 후 10분간 쉬며 권투를 하거나 마사지를 받기도 한다. 또 물리치료사에게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근육통 등을 치료받는다.
김은미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장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친절한 서비스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며 "사회적으로 서비스 제공 방식에 대해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이지영 인턴기자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3)
전형우 인턴기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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