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공자본으로 총수 지배권 강화" "금지땐 적대적 M&A 노출"
재벌 총수 입장에선 경영권이 가장 먼저다. 그룹 전체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 또 언제 닥칠지 모를 적대적 인수합병(M&A)시도로부터 경영권을 지켜내는 것,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맥락에서 재벌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제민주화 이슈는 바로 순환출자 금지다. 작은 지분을 가진 총수가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고리가 바로 순환출자이기 때문이다.
김성진 변호사(민주화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는 "순환출자는 가공자본을 통해 총수일가의 지배권만 강화해주는 장치"라며 금지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에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어느 나라도 순환출자를 법으로 금지하거나 강제 해소토록 하는 예는 없으며 현행 공정거래법으로도 얼마든지 문제점은 해결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경제민주화를 위해선 순환출자가 꼭 해소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전삼현: 순환출자는 재벌 총수의 사익추구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신규사업에 진출하거나, 외환위기 직후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 순환출자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도 정확히 어떤 측면에서 국익과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적은 지분으로 황제 노릇을 하는 총수가 못마땅하다'는 정서는 알겠지만, 그런 정서 때문에 순환출자를 못하게 하는 건 인기영합적인 발상이다.
김성진: 현재 국내 재벌총수는 1% 남짓한 지분만으로 사실상 100%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소유와 지배의 괴리가 그만큼 큰 것이다. 괴리가 커질수록 회사의 이익보다는 지배주주(총수) 이익에 따른 의사결정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1% 지분으로 100% 권한을 행사하는 문제를 막기 위해 순환출자를 규제하자는 것이다.
-재계에선 지배구조는 기업이 선택하는 것이지 법으로 강제할 사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김성진: 두 회사간 상호출자는 현재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같은 돈을 서로 주고받기식으로 출자할 경우 외형은 부풀려지지만 결국 알맹이 없는 가공자본이기 때문이다. 순환출자는 이런 상호출자 규제를 피하려는 일종의 탈법행위다. 이를 방치할 경우 상호출자가 갖는 문제점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 법으로 규제하는 건 당연하지 않는가.
전삼현: 왜 대기업 지배구조를 꼭 법으로 강제하면서까지 바꿔야 하나. 순환출자도 일종의 재산권 행사인데, 재산권 행사를 법으로 금지하려면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이익(법익)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 법익이 과연 무엇인지 명확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다. 위헌논란도 있을 수 있다.
김성진: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통해 형성된 가공자본, 그에 기반한 가공의결권, 재벌 총수가 소유권에 비해 과도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게 핵심이다. 가공의결권은 다른 주주의 의결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시장경제원칙에도 위배되는 것 아닌가.
전삼현: 총수가 있는 대기업들이 국가경제를 이끌고 있고, 이들 기업의 다수 주주들 또한 높은 배당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순환출자가 다른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기업의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수단이라면 오히려 좋은 지배구조일 수도 있다.
-답이 안 나올 때엔 외국사례를 참고하게 되는데, 순환출자를 직접 규제하는 나라는 없나.
전삼현: 없다. 세계 어느 나라도 순환출자를 금지하거나, 법으로 해소를 강제하는 나라는 없다. 기업에게 어떤 지배구조는 되고, 어떤 지배구조는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정부(법)가 정해주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김성진: 재계에선 일본 도요타자동차를 순환출자 사례로 종종 언급한다. 하지만 일본은 소유와 경영이 잘 분리돼 있어 총수 1인이 전횡하는 우리나라 재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독일도 기업집단법이 제정돼 있어, 지배관계가 투명하게 공시되고 잘못에 대해선 손해배상책임을 묻도록 하고 있다. 이들 나라는 법 제도와 기업 내부견제장치들이 충분히 정비돼 있기에 순환출자를 해도 폐해가 없는 것이다.
-기업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경영권 방어다. 순환출자나 의결권이 제한되면, 그래서 1% 지분을 가진 총수가 정말로 1%의 경영권만 행사하게 된다면 당장 적대적 M&A에 노출될 수 있다. 그래서 재계는 순환출자규제가 외국자본에게만 유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던데.
김성진: 과장된 논리다. 순환출자가 문제되는 15개 재벌 중 실제 부담이 있는 그룹은 현대차, 삼성, 현대중공업 정도로, 경뎠퓻?실질적 위협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재벌들은 툭하면 적대적 M&A 위협 운운하는데, 참여정부 시절 재벌 금융사 의결권 제한을 강화할 때도 그런 얘기가 나왔지만 2008년 시행 후 5년이 지나도록 외국자본의 경영권 위협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전삼현: 미국은 오래 전부터 '황금주'(장기보유 대주주에게 복수의결권 부여)를 허용해왔고, 일본도 2005년 회사법을 제정하면서 복수의결권을 명문화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순환출자까지 해소토록 한다면 경영권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삼성과 현대차 등이) 이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없다는 식의 정치권 주장 자체가 정치적이다.
-대기업이 경제를 끌고 가는 상황에서 만약 순환출자규제로 정말로 투자가 위축돼 경제활력이 떨어진다면 현실적으로 이 제도를 강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순환출자해소에 필요한 비용을 신규투자에 쓰는 게 국가 경제를 위해 더 이득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김성진: 핑계일 뿐이다. 만약 순환출자 연결고리 중 한 회사의 지분매각을 통해 고리를 끊을 경우, 일단 다른 회사는 부담이 없다. 또 지분을 매각한 회사는 그만큼 외부자금이 유입돼 오히려 자본이 충실해질 것이다.
전삼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순환출자를 못하게 되면 대기업 총수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결국 사내 자금을 주식매입에 투입하게 될 것이다. 기업의 투자여력은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정리=이성기기자 hangil@hk.co.kr
■ A→B→C→A 환상형 출자구조 1%지분으로 그룹전체 지배 가능
순환출자란 한 기업집단의 출자구조가 'A→B→C→A'식으로 되어 있는 지배구조를 말한다. A계열사가 B계열사에 출자하고, B계열사는 C계열사에 출자하고, C계열사가 다시 A계열사에 출자하는 식이다. 화살표를 이어보면 동그란 고리모양을 이룬다고 해서 '환상형' 순환출자라고 부른다.
순환출자가 논란이 되는 건 적은 지분으로도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 예컨대 총수가 A계열사의 경영권만 확고하게 지배하면, B C D 계열사는 직접 지분이 없어도 순환출자를 통해 저절로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 재벌구조의 특징이다. B C D 계열사의 자본금은 따지고 보면 A회사에서 출발한 것이 순환출자를 통해 이전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자본을 가공자본이라고도 부른다.
재벌그룹 가운데 이 같은 순환출자 고리가 있는 그룹은 삼성과 현대자동차 등 15곳으로 파악된다. 삼성그룹의 경우 에버랜드를 정점으로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것이 순환출자의 기본 축. 하지만 삼성카드가 에버랜드 지분 25.6% 중 20.6%를 매각하면서 환상형 순환출자는 수직출자로 바뀌었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와 시민단체 등에선 ▦삼성전자→삼성SDI→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 ▦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 ▦삼성전자→삼성카드→제일모직→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 ▦삼성전자→삼성SDI→삼성물산→삼성전자 등 4가지 작은 순환출자고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도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 ▦현대차→기아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차 ▦현대차→현대글로비스→현대모비스→현대자동차 등 3개의 핵심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여야 정치권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같은 순환출자 구조를 금지해 대기업들의 지배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통합당의 경우 ▦신규 순환출자는 아예 금지하고 ▦기존 순환출자도 3년 안에 해소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당론은 아니지만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은 ▦신규 순환출자 금지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등의 내용을 담은 '경제민주화 3호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재계는 정치권의 주장대로 순환출자 지분을 해소하려면, 신규 투자 및 일자리 창출 위축 등의 부작용이 우려될 뿐 아니라 경영권 방어를 위해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구소는 최근 '대기업기업집단 순환출자 현황 및 지분가치 추정'보고서를 통해 15개 그룹이 순환출자 해소에 필요한 최소금액은 9조6,634억원(6월말 기준)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국에도 순환출자는 있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나 루이뷔통 불가리 등 명품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 루이뷔통 모엣 헤네시(LVMH)그룹 등 순환출자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은 여럿이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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