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녁은 사는 곳이 어디요?
지금 거기 못 가요. 추월이 형님이 알고 있으니 저들에게 시달리면 대줄 거예요. 그나저나 서방님 거처는 어디요?
나는 애오개 주막거리에 사오.
아직 인정 전이라 성문이 열려 있을 테니 그리로 갑시다.
두 사람이 간신히 해시 무렵에 돈화문을 빠져나가 애오개 주막에 이를 즈음에 문안에서 인경 치는 종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방마다 불이 꺼져 있어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드나무는 어둠 속에 흉물처럼 서 있었다. 신통은 익숙하게 캄캄한 마당을 돌아 뒤채의 구석방으로 그믐이를 데려갔다. 그는 먼저 들어가 등잔에 불을 붙였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오.
그믐이는 방 안에 들어와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시렁에 얹힌 이부자리와 고리짝이며 벽에 걸린 옷걸이 횃대며 작은 책상 등속을 둘러보았다.
여기 혼자 사세요?
그믐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신통이 되물었다.
집이 따루 있다면 어디 살우?
야주개 앞동네인데 세 살다 내주게 생겼어요.
그럼 살림하셨소?
그믐은 고개를 희미하게 까딱거렸고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신통이 먼저 두루마기와 갓을 벗어 횃대에 걸고는 이부자리를 요와 이불로 나누어 자신은 요를 들고 윗목으로 올라가며 그녀에게 이불을 내주고는 말했다.
나는 여기 누울 테니 이녁은 조 아래서 이불 덮고 눈 좀 붙이슈.
이신통이 문 앞에 눕고 그믐이가 문을 머리 쪽에 두고 아랫목에 누우니 그들은 기역자로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머리는 서로 지척이라 불을 끄고 나서도 잠이 들지 않았던지 그믐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신통은 듣던 중에 다시 묻고 하면서 날을 밝히게 되었다.
저는 강화에서 태어났고요 부모님은 무당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부모가 일찍 죽어 김포에서 유명하던 작두만신의 양아들로 자라나 굿을 할 때에 제상 차리기 같은 잔심부름을 하면서 곁눈으로 무악과 춤을 보고 잽이가 되었답니다. 어머니 어린년(於仁蓮)은 열일곱에 시집을 갔는데 신랑이 너무 징그럽고 무서운데다 어찌된 노릇인지 온몸이 빼빼 마르고 뼈마디마다 쑤시면서 밥도 못 먹는 중병에 걸렸다지요. 시어머니와 밭에 김을 매러 나가서도 갑자기 팔다리가 땅에 닿지를 않고 허공중에 뜨는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하여 손뼉 치고 춤을 추면 온몸이 날아갈 듯 가뿐해졌답니다. 남이 보면 영락없는 미친년이겠지요. 나무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가면 어느 길 모퉁이선가 꼭 헛것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서로 소곤대는 소리까지 다 들리고 보이더랍니다. 그러니 불쑥불쑥 혼잣말로 대꾸하게 되겠지요.
집안에서는 미친병이 들었다고 아예 골방에 넣고 상대를 않는데, 어느 날 꿈에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 지금 이 길로 집을 나가 어느 동네 어느 골을 찾아가면 우물이 있는 앞집에 이러저러한 생김새의 만신이 있을 터이니 그게 너의 새어머니라고 알려주더랍니다. 그래서 앓고 누워 있던 우리 엄마 어린년이가 벌떡 일어나 훨훨 춤을 추며 몇 십리를 달려가 그 집을 찾았고 만난 이가 바로 작두만신이었답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작두만신 할머니도 신딸이 될 여자가 찾아오는 꿈을 꾸고는 우물가에 나와 기다리던 참이었답니다. 엄마는 그 집의 일을 돌보며 신내림 굿을 하고 무업을 전수받았고 만신의 양아들로 잽이가 된 아버지와 부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부모는 김포에서 제금 나와 강화 성내로 들어가 무업을 차렸답니다. 제가 거기서 태어나 열두 살까지 살았습니다. 새로 온 강화유수가 정자 수리를 구실로 고을 당나무를 베어버린다는 역을 일으키기 전까지 우리 부모는 강화 일대에서 영험한 무당으로 철철이 동제에서 사삿집 무꾸리에 이르기까지 밥 먹고살 만했던 것이지요. 강화유수가 당나무를 베어버린다니 동네 사람들이야 사또 나리의 엄명이라 속앓이만 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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