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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에세이] 대통령의 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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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에세이] 대통령의 지병

입력
2012.08.1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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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지병(持病)은 이따금 그 나라한테 내린 축복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전직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지금의 나처럼, 자기네 신문에 기고한 글 '내가 기억하는 FDR'에 나오는 한 대목. '감기에 걸려 와병 중인'(Bed in Cold) 루스벨트 대통령을 워싱턴포스트가 오보했다. 'Bed in Coed'라 오기하는 바람에 미 대통령을 하루아침에 '남녀 동급생과 한 침대에 누운'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더 가관은 그 기사를 읽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편집국에 전화를 걸어 "그 신문을 100부만 살 테니 나의 옛 고교 남녀 동창들에게 우송해 달라"는 이색 부탁을 한 것이다. 나의 워싱턴 근무시절 그 신문의 루스벨트 특집 난에서 읽었던 기사로, 글을 기고한 사람은 50여 년 전 루즈벨트로부터 그 부탁 전화를 받았던 바로 그 기자다. 언뜻 대통령 특유의 유머와 기지로 비칠 내용이나, 내겐 왠지 아프게 읽힌다. 루스벨트의 대통령 재임 12년을 줄곧 괴롭혀 온 소아마비 환자의 아픔과 회한이 절절이 맺힌 부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두 다리 불구가 노출되는 걸 누구보다도 꺼린 인물이다. 심지어는 휠체어를 굴리는 자신의 모습마저 숨기기 위해 공식 연회나 연설장에 다른 참석자보다 매번 먼저 나타나는 대통령이었다.

100부의 신문 주문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발병 전 사귄 고교 친구들에게나마 두 다리로 펄펄 뛰고 닫던 원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었거나, 아니면 그런 환영(幻影)만이라도 간직하려 했던 것 같다. 그는 소아마비에 걸리고 나서도 언제고 스스로를 '회복중인 장애자'로 불렀다. 4선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물론 심지어는 죽기 3주전까지도 "새 마사지 팀이 (백악관에)도착하는 대로 충분히 딛고 일어설 것"을 확신했다고 사학자 휴 갤러거는 저서 에서 밝히고 있다. 갤러거 역시 소아마비 환자였다. 따라서 대통령의 심리 분석까지 곁들인 그의 연구에는 다른 학자와 비교될 수 없는 권위가 따른다.

특히 다음 대목에 눈이 간다. "오랜 세월 두 다리를 질질 끌면서 그는 바뀌기 시작한다. (자기처럼) 뭔가를 끌 수밖에 없는 타인을 돕는 데 몰두하게 된 것이다. 가난이나 문맹의 퇴치도 그런 끌 것들의 하나였다. 누군가 옆에서 돕지 않는 한 제 힘으로는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끌 것 들이었다."

여러 해 전 미국 사학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조지 워싱턴, 링컨과 함께 루스벨트는 미국에서 제일 훌륭한 3명의 대통령으로 지목된 바 있다. 그는 특히 국민 네 사람당 한사람을 실업자로 전락시킨 대공황의 위기에서 미국을 건진 거목이다. 공황시절의 허기와 눈물을 기억하는 미국 노인들 가운데는 지금도 루스벨트 소리만 들으면 눈물을 떨구는 사람이 많다. 그는 또 2차 대전 참전으로 오늘의 미국을 만든다. 17위의 군사력에 머물던 미국의 국력이 이 전쟁으로 일약 세계 1위로 치솟는다. 공황으로 깊이 팬 절망의 골을 폭발적인 전시경제의 팽창으로 일거에 덮은, 발군의 리더십이다. 국민에게 꿈을 심고, 또 이를 구현한 대통령이다. 이런 루스벨트의 위업을 재는 데에도 갤러거는 예의 소아마비라는 대통령의 지병을 잣대로 들이댄다. 그는 책 속에서 대통령 부인 엘리너 여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 남편이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대통령에 당선됐을 것으로 믿습니까, 미세즈 루즈벨트?", "물론이죠. 그러나 전혀 다른 대통령이 됐을 거예요." 부인이 말하는 그 다른 대통령은 어떤 타입일까. 추측 컨데 닉슨처럼 악골(顎骨)이 발달하고 근엄한 대통령일 것이다. 나약하나 환한 얼굴의 루스벨트의 진가가 더욱 돋보인다. 루즈벨트가 가장 약했을 때 미국은 가장 강한 나라가 됐다. 자신의 지병마저도 나라의 지복으로 바꾼 대통령이다.

넉 달 후면 대선을 치룰 마당에 딴 나라 대통령의 지병 이야기를 꺼냄은 생뚱맞을지 모른다. 우리도 한 번 아름다운 대통령을 갖고 싶어서다.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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