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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美대륙 들썩이게 한 '로맨틱 포르노'…딱 19금 신데렐라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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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美대륙 들썩이게 한 '로맨틱 포르노'…딱 19금 신데렐라 스토리

입력
2012.08.1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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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 E L 제임스 지음ㆍ박은서 옮김

시공사 발행ㆍ1권 416쪽, 2권 364쪽ㆍ각 1만2000원

영국작가 E 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Fifty shades of Grey)는 <50가지 그림자 심연>(Fifty shades darker) <50가지 그림자 해방>(Fifty shades of freed)과 함께 '그레이 3부작'으로 불리며 세계 출판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시리즈는 지난 4월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최단기간 전세계 2,000만부 판매 등 출판계의 상업적인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이 책이 이렇게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일명 '엄마 포르노'로 통하는 인물들의 진한 정사장면 때문이다. 저자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할리퀸 소설 <트와일라잇> 의 성인버전을 인터넷에 썼고, 전자책 돌풍에 힘입어 출판사 랜덤하우스의 문학전문 임프린트 빈티지(Vintage)에서 이를 종이책으로 출간했다.

국내 번역된 1부를 읽어봤으나 소설 속 정사장면이 인간 심연을 묘파해 예술성으로 승화되는, 유명출판사의 명성에 걸 맞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해 '킬링타임용 19금 소설'이다. 그래서 소설의 인기가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한국에서도 이어질지 갸웃거려진다.

스물한 살 워싱턴주립대 졸업반인 아나스타샤 스틸은 아픈 친구를 대신해 스물일곱 살 재벌 크리스천 그레이를 인터뷰하러 간다. '심각하게 도를 넘은, 빌 게이츠 스타일의' 그는 '아도니스' 외모에 요트와 헬리콥터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르네상스맨인데다 제3세계 빈곤 퇴치를 위해 노력하는 박애주의자다.

남자는 인터뷰 대상의 기본적인 정보도 모른 채 친구가 써준 질문지를 읽는 여자에게 한눈에 반한다. 인터뷰는 역전되고 남자는 여자에게 이것저것 신변잡기적인 질문들을 쏟아낸다. 여자는 예, 아니오로 일관하고 이 멍청한 대답이 남자를 더 반하게 만든다. 돈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남자는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일에 돈을 쏟아 붓고, 여자는 그런 스토킹을 즐기며 연애를 시작한다. 둘이 눈 맞추고, 몸도 맞추는 속도는 춘향이와 이도령,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이나 초스피드다.

둘의 정사가 시작될 때 쯤 남자는 여자를 '빨간 가죽을 씌운 매트리스 뿐인' 방으로 데려간다. 남자의 성적 취향은 소위 'BDSM', 결박(bondage)과 훈육(discipline)을 즐기는 SM(사디즘-마조히즘)이다. 남자는 당당하게 말한다. "난 규칙이 있고, 네가 따라주길 원해. 내가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 규칙을 따른다면 상을 주지." '비공개 합의서'를 들이미는 남자에게 여자는 조용히 말한다. "섹스를 해 본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남자는 훈육을 시작하고, 여자는 일취월장의 속도로 학습한다. 두 번의 정사가 끝난 후 잠이 든 여자는 피아노 소리에 깨고, '알렉산드로 마르첼로의 오보에 협주곡'의 바흐 편곡을 전라로 연주하는 남자를 보면서 감탄한다. 이런 식의 에로틱 코미디 장면은 이 소설의 서막에 불과하다.

제목에 들어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도대체 언제 나올까라는 생각이 들 즈음 남자는 자신의 그늘을 하나씩 고백한다. 자신은 4살 때 입양돼 자수성가한 사람이며, 희한한 성적 취향은 16살 때 양어머니의 친구에게서 7년간 배운 것이며, 그때 자신은 파트너에게 순종하는 '서브미시브'(submissive)였고, 자신의 엄마는 '약쟁이 매춘부'였다는 등등의 이야기.

남자는 다시 테이프 결박, 밧줄 결박, 손목과 발목 모아 묶기, 바이브레이터 등을 구체적으로 쓴 '합의서'를 들이밀고 여자와 협상을 원한다. 여자는 서명을 미루며 합의서에 적힌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해본다. 1권이 요가동작 같은 성애를 통해 남자의 독특한 취향을 드러낸다면, 2권은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하드코어 장면들이 속출하며 그레이의 그림자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책을 덮고 난 뒤 그레이의 그림자보다 아나스타샤를 결박했던 책 표지의 은색 넥타이가 더 기억에 남는다. 그레이의 그림자가 50가지인지는 세어보지 못했지만, 그게 새삼 궁금해져 다시 읽으려다 "죽는 시간"이 아까워 그러지 못했다. 말랑말랑한 동양계 '야동'을 선호하는 국내 여성들의 취향에 이런 미국식 하드코어 소설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출판사는 기대가 큰 모양이다. 번역 외국 소설로는 이례적으로 초판 3만부를 찍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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