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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할리우드가 사랑한 SF거장의 단편집디스토피아적 상상력·반전의 쾌감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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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할리우드가 사랑한 SF거장의 단편집디스토피아적 상상력·반전의 쾌감 일품

입력
2012.08.1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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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필립 K 딕 지음ㆍ조호근 옮김ㆍ폴라북스 발행ㆍ736쪽ㆍ1만8800원

이런저런 해설이 붙어 있는 책이지만, 우선 지적 도락으로서 책 읽기에 적당한 소설집이다. 겉가죽은 SF 장르다. 하지만 미래 세계에 대한 묘사는 정밀하지 않다. 장르적 요소는 오히려 이야기의 탄력을 위해 설치된 듯 보인다. 여러 개의 트릭을 뚫고 나가야 하는 추리소설처럼, 저자가 마지막 패를 뒤집는 순간까지 호기심이 점증되는 데 이 책을 읽는 재미가 있다. 단선적 이야기를 담기에도 빠듯한 20~30쪽 분량의 단편들인데, 그 속에서 빠르게 방향을 바꾸는 상상력의 입자들이 진동하고 있다.

표제작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를 보자. 주인공 퀘일은 화성 여행을 하고 싶지만 돈이 없는 미래 세계의 소시민이다. 그는 너무나 화성에 가보고픈 마음에, 화성에 갔다 왔다는 '거짓 기억'을 이식 받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런 일을 해주는 회사가 근미래에 있다고 가정하는 게, 말하자면 이 소설이 지닌 SF적 요소다. 하지만 작품의 고갱이는 그런 환상이 실현되는 미래상이 아니다. 기억의 이식 과정에서 말썽이 일어나고, '거짓'과 '기억' 사이의 몇 차례 숨가쁜 전복이 반복된다. 스피디한 반전이 자아내는 쾌감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다.

여기까지가 도락으로서의 독법이다. 원한다면 다른 것을 더 읽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 '거짓'과 '기억'의 혼돈 속에서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과연 내가 아는 나인가? 내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이것은 진짜 현실일까?' 거창하게 말하려면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이나 버클리의 인식론을 들먹일 수도 있겠다. 이 정도로 정리하자. 인간이 미래에 대해 갖는 공포의 큰 부분은, 기술이 마침내 의식마저 환원 가능한 원소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예감이 아닐까. 두렵지만 매력적인 예감이다. 표제작은 '토탈리콜'이라는 제목으로 두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저자는 시간에 대한 일상적 관념에 의문을 갖게 만들거나('약속은 어제입니다'), 신과 종교, 불멸에 대한 통념에 균열을 일으키는('작고 검은 상자') 등 시종 충격을 시도한다. 그래서 현란한 천체물리학의 용어들 대신 인간의 근원적 조건에 대한 단어들이 책의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그가 "자신의 철학을 펼치기 위해 SF라는 장르를 선택한 작가"라는 평을 듣는 까닭이다. 반면 문체는 유머와 해학, 때로는 조롱이 가득하다. 쓰여진 지 오래된 작품들이라 책 속의 '미래'는 다소 고졸한 느낌을 준다.

저자의 이름은 필립 K 딕이다. 이 책에 실린 25편의 단편은 1963~1981년 발표한 것들이다. 반복된 이혼, 편집증, 정신분열, FBI의 조사, 약물 중독, 신비주의 체험을 겪던 그는 1982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고 나서야 유명해졌고, 이른바 고전이라는 책들이 따분한 순서대로 소개된 탓에, 한국에는 최근에야 번역 출간이 시작됐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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