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백석(白石)이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 그가 남긴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들은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백석의 해에 다시 기억하고 싶은 조선시대 시인이 있으니, 400년 전인 1612년(광해군 4년) 44세로 세상을 떠난 석주 권필(1569-1612)이다. 그가 살다 간 선조-광해군 연간은 임진왜란과 어지러운 정치로 편할 날이 없던 난세지만, 문학사로 보면 조선 한문학의 절정기여서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린다. 권필은 이 목릉 문단에서 동악 이안눌과 함께 조선 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시인이다. 당대에 이미 시의 대가를 넘어선 정종(正宗ㆍ으뜸)이라는 평을 들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서정과 호방한 기풍이 특징이다. 북한에서는 "조국과 인민에 대한 사랑, 고상한 인도주의적 사상, 착취자에 대한 강한 비판적 정신"을 높이 평가해 "16, 17세기 우리 문학사의 기념비적 존재"라고 기린다.
그런 그가 매를 맞아 죽었다. 광해군 시절 외척의 전횡을 풍자하는 시를 썼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친국을 받고 모진 고문 끝에 장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궁류시(宮柳詩)로 불리는 문제의 시는 이렇다. "대궐 버들 푸르고 어지러이 꽃 날리니/ 성 가득 벼슬아치는 봄볕에 아양 떠네/ 조정에선 입 모아 태평세월 하례하나 / 뉘 시켜 포의 입에서 바른 말 하게 했나(宮柳靑靑花亂飛 滿城冠蓋媚春輝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
대궐의 버들, 곧 궁류가 광해군의 비 유씨의 동생인 유희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돼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권필을 잡아들일 때 재상 이덕형과 이항복이 광해군에게 여러 차례 눈물로 호소하며 말렸으나 소용 없었다. 절개가 높아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지도 않은 것이 그만 그렇게 꼬였다. 그는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 받기를 싫어해 평생 야인으로 살았고 권력에 빌붙어 행세하는 자들을 미워했다. 광해군 초 권세가 이이첨이 그에게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고 남의 집에서 마주치자 담을 뛰어넘어 피한 일도 있다.
권필의 시는 한문으로 돼 있어 더러 번역이 되긴 했어도 백석 시만큼 친숙하진 않다. 이 낯선 시인을 새삼 떠올린 것은, 유난히 무더운 올여름을 나면서 그의 시가 지닌 호방한 기운에 땀을 씻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온 천지를 내 집 삼고 / 만물을 양식 삼아 / 별들을 패옥 삼고 / 구름 달을 치마 삼아 도(道)와 더불어 훨훨 날아" 거침 없이 살겠다고 쓴 시에서도 드러나듯 그가 꿈꾼 방외인의 삶은 가히 우주적 스케일을 자랑한다. 같은 해에 태어난 그의 벗이자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권필 시의 빼어난 기상을 이렇게 칭송했다. "때때로 꺼내어 외우면 바람이 어금니와 볼 사이로 으시시 일어나 절로 정신이 멀리 높은 하늘에까지 솟아오름을 알지 못하겠다."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죽기 사흘 전 그는 평생 쓴 시를 보자기에 싸서 지인에게 주고 마지막 시를 썼다. "평생에 우스개 글귀 즐겨 지어서/떠들썩 온갖 입에 오르내렸네/시 주머니 닫고서 세상 마치리/공자님도 말 없고자 하셨거늘."
유명세가 화를 불렀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조에 그런 기록이 나온다. "권필은 시를 지어 풍자하기를 좋아했는데, 매번 한 편이 나오기만 하면 세인들이 떠들썩하게 외워 전하니 이로 말미암아 좋아하지 않는 이가 많아져 마침내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들 한다."
과연 그리 되었다. 그게 어찌 400년 전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죽임을 당하지는 않더라도 입 바른 소리 했다가 경을 칠까 두려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굳이 최근 일을 돌이키자면, MBC시사고발 프로그램 PD수첩 작가들이 무더기로 해고된 것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열거하자면 줄줄이 이어지겠으나 무더위에 안 그래도 높은 불쾌지수만 더 올릴 테니 생략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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