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만에 가 본 해운대는 놀라웠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을 듯했다. 부산영화제 취재차 잠시 들렀던 희미한 기억은 오늘 해운대의 모습 앞에서 완전히 무화되고 말았다. 그 사이 2007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해운대 동백섬 누리마루에서 열렸다는 것, 인근 광안리 앞바다에 광안대교가 건설됐다는 것, 해운대에 주상복합 건설 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 정도는 뉴스를 통해 듣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까지 변했을 줄은 몰랐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와 묘하게 어울리며 들어선 초고층 빌딩들, 그것들이 뿜어내는 야경은 휴가길에 함께 나선 아이들의 표현대로라면 '홍콩 필'이었다. 출발하기 전 자연의 부산 바다 모습을 훼손하지나 않았을까 은근히 걱정했던 광안대교는 막상 보니 흉물은 아니었다. 해운대는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안으로도 성장한 것 같았다. 지금도 한창 건설되고 있는 첨단의 건축물들과 대조적으로 구시가, 시장통, 유원지 주변은 차분하고 질서 있게 정돈돼 있었다. 그것이 부산영화제라는 비교적 성공한 국제행사 개최지로서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인지, 개발이익을 노린 부동산 붐의 상승효과인지, 관제 도시정비의 결과인지는 주마간산 휴가객의 눈으로는 간파하기 힘들었지만 어떻든 해운대가 주는 느낌은 남달랐다. 모든 빼어난 국제도시가 갖고 있는 '신구의 조화'가 얼마만큼은 자연스럽게 우러난다는 인상을 받은 탓이다.
폭염에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부산 구도심의 교통 흐름은 여전히 답답하고, 산등성이를 온통 차지한 고층아파트에는 짜증이 절로 나고, 자갈치시장에서는 오늘도 아지매들이 생존의 좌판을 벌이고 있는데 웬 해운대 타령이냐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해운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숨 막히는 일상에서 그래도 잠깐씩 벗어나 어디로건 떠나봐야 뭐가 보여도 보인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영국 신문 파이낸셜타임스 독일판이 '휴가를 두려워하는 한국인들'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어 화제가 됐다. 그 기사는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길고 자살률이 높은 산업국가는 없다. 한국인의 연평균 휴가기간은 11일에 불과하고 그나마 대부분은 단기로 나눠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그러고는 한국의 장시간 노동, 업무의 비효율성, 일 중독 등은 결국 노동자의 '자기 착취'로 이어진다고 규정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자기 충전을 위해 휴가를 가느니 차라리 보너스를 한 푼 더 챙기거나 상사의 칭찬 한 마디 듣는 것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한 한국전문가라는 이의 말을 빌어 "자신을 기업과 국가라는 커다란 기계의 작은 부품 정도로 생각하는 인식이 문제"라며 "한국인들은 2주 동안 자리를 비우더라도 일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을 다른 동료가 깨닫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이 한국전문가는 지금 대부분의 한국 성인들이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아버린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말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엉뚱하게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 휴가 안 간다고 의아해 하는 건 형편 모르고 하는 배부른 소리라고 치부하더라도, 어쨌든 지금은 떠나야 할 시기다. 여행을 이야기했던 이들 중에 언뜻 생각나는 이는 마담 보바리를 창조해낸 플로베르다. 그는 부르주아지들이 활보하던 19세기 파리가 "지겹다, 지겹다, 지겹다!"며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를 외치면서 떠나기를 갈구했고, 이집트로 가 낙타를 몰겠다는 꿈을 꾸었던 몽상가였다. 몽상일지라도 '어디로라도'라는 바로 이 말이야말로 여행, 아니 휴가의 본질이다. 어디로라도 떠나서 내가 잊고 있던 것, 내가 모르고 있던 것 혹은 내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던 것, 내가 진정 꾸고 싶던 꿈과 조우하는 것이 휴가가 아닐까 싶다. 결국 나 자신과 만나는 길이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돌아와서 다시 스스로를 착취할 수밖에 없더라도 그 이전과 이후의 우리는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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