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채집과 퇴비.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교의 중요한 여름방학숙제였다. 지천에 널린 것이 풀이고 곤충인 농촌이지만, 사실 이 둘은 코흘리개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소 꼴 베기에 이골이 났다 하더라도 적지 않은 양의 풀을 모으려 낫질하다가 손가락을 다치기 일쑤였다. 변변한 매미채조차 없어 잠자리나 나비와 메뚜기를 오롯이 생포하려 하루 종일 무더운 여름 들과 산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이 나무 저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했다.
■ 그때도 대리숙제는 있었다. 지금처럼 전문대행업체나 어머니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퇴비를 해주고, 형들이 곤충을 잡아주었다. 부잣집 일꾼들이 대신했다. 해 뜨자마자 아이들은 큰 빗자루를 들고 마을 앞에 있는 연못으로 뛰어갔다. 알을 낳기 위해 짝을 지어 몰려든 장수잠자리들이 연못 가장자리에 있는 풀에 앉으면 잽싸게 빗자루를 던졌다. 매미는 긴 막대 끝에 말총으로 만든 올가미가 있어야 했지만, 말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맨손으로 잡았다.
■ 배가 고픈 농촌 아이들에게 곤충은 먹거리이기도 했다. 메뚜기는 물론이고, 방아개비와 물방개, 심지어 잠자리까지도 구워서는 몸통만 먹었다. 요즘 아이들은 기겁을 하겠지만, 그 때는 아이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그렇게 가깝고 흔하던 곤충들이 농약과 공해로 들과 산과 연못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식물 수정(受精)의 일등공신인 벌까지 이제는 점점 줄어들어 자연생태와 인류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반가운 살아있는 곤충들.
■ 경북 예천에서 곤충바이오 엑스포(7월28일~ 8월19일)가 열리고 있다. 뻣뻣하게 죽어있는 것들을 모아놓은 곤충채집이 아니다. 나무와 숲 속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장수풍뎅이, 반딧불이, 사슴벌레, 나비, 호박벌 8만 마리를 직접 보고 만지고 잡아도 볼 수 있다. 자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전시장인 그곳을 폭염 속에서도 이미 25만 명이 찾았다. 향수와 이색체험으로 끝나지 말고, 곤충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 곤충 없이는 인간도 없으니까.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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