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지금 같이 몹시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외출에서 돌아 온 엄마의 얼굴에 더위 때문만도 아닌 홍조가 가득했다. 연초를 포함해 1년에 두어 번은 가족들 점 보러 가기를 잊지 않는 엄마였다. 물을 조심하라는 괘가 나오면 그 해엔 강이든 바다든 물가에 가는 것을 삼가야 했다. 점 따위 안 믿는다면서도 실제로 조심하는 마음이 들곤 했으니, 점의 순기능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제주도까지 이름이 난다'. 그날 엄마가 본 딸내미의 점괘는 이것이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여러 달 째 '백수'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늘 무릎 나온 '츄리닝' 차림이어서, 남동생으로부터 '하체만 S라인'이라는 핀잔을 듣던.
엄마를 들뜨게 한 그 점괘에 나는 '영부인이라도 되려나?'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이 수그러들고, 슬며시 기대감 같은 것이 일기도 했다.
그 해를 넘기기 전에 잡지 사보 등에 글을 쓰는 '자유기고가'가 됐다. 자유라는 멋진 호칭이 붙었으나, 4대 보험도 퇴직금도 없고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는 직업이었다. 나중엔 한 달에 수 개 매체에 글을 쓰면서 수입이 늘었지만, 처음 원고지 15매의 글을 기고하고 받은 고료는 15만원이었고 그것이 그달 수입의 전부였다.
한 칸 한 칸 원고지 칸을 채우는 일은, 꼭 한 땀 한 땀 하는 손바느질 같다. 받아든 책과 첫 고료가 속으로는 뿌듯했는데, 집에는 체면이 서지 않았다. 고료를 받은 날 '봉투' 대신 글이 실린 책자를 엄마에게 내밀었더니 대뜸 "이 책이 전국으로 나가는 거냐?" 하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봐라, 제주도까지 이름이 난다더니, 꼭 그렇게 됐지 뭐냐." 하고 기뻐했다. 기발한 해석에 웃음이 났다. 전에 내가 한 말도 잊지 않고 "영부인 된 것보다 나는 이게 더 좋다. 영부인은 남편 잘나서 되는 거지만, 이건 네 힘으로 한 거 아니냐." 하셨다. 그 첫 취재 글은 오래도록 식탁 유리 밑에 진열되어있었다. 화장품외판원이든 가스검침원이든, 집에 온 손님은 물 한 잔이라도 늘 그 식탁 자리에 앉아 마셔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나라가 첫 번째 IMF 상황을 맞았다. 잡지와 사보들이 무더기로 폐간되거나 월간이 계간으로 변했다. 일거리가 줄면서 다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실내복이 일상복이 되어갔다. 집에 온 이웃과 마주쳐 민망해질라치면 "우리 딸은 글을 써요."하면서 엄마가 물색없는 변명을 대신했다. 글 쓰는 딸이 왜 그렇게 자랑스러운 지는, 이런 저런 근대사의 어머니들과 다를 바 없는 엄마의 개인사를 상상하면 되겠다. 노년을 맞기까지 오랫동안, 엄마는 한복 바느질로 살림을 꾸렸다.
IMF를 지나고 주변에 커피숍과 인터넷 창업 붐이 일었을 때, 또는 결혼을 하고나서도, 꾸준히 문화계 언저리에서 글을 쓰며 살아 온 것이 어쩌면 엄마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그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칼럼을 연재키로 한 후 제일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누구보다 좋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딸이 신문에 글을 쓰는 구나' 하며 느꺼워했다. 삽시간에 고모, 이모들로부터도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칠순을 넘기면서부터는 돋보기 쓰고 보는 일이 힘들다며 신문구독을 끊은 친정집이었다. 매주 나가는 칼럼도 아닌데, 화요일만 되면 멀리 신문가판대가 있는 지하철역까지 가서 사오는 눈치다. 이제는 이 칼럼 조각이 친정집 식탁 유리 밑에 깔려 있다. 전처럼 종이가 유리면에 붙어 상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칼럼을 쓰면서 누가 읽는지, 읽기는 하는 지 알 수가 없다. 무더위 속에 책상에 앉아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글을 쓰고 있자면, 효용성에 의구심이 일기도 한다. 다만 한 명의 독자는, 오늘 아침에도 분명 종종 걸음으로 이 신문을 사러 갈 것이다. 폭염특보가 내린 속에, 더위 때문만은 아닌 홍조를 띠고…그 응원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생각하면 우리들 삶의 대부분은, 늘 누군가가 부축하고 응원해서 여기까지 온 삶이다.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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