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어느 학술 행사 자리에서 이름난 학자의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그 날, 창밖에선 마침내 장마가 끝났음을 알리는 매미 울음이 자욱했다. 더위를 짐작하지 못했는지 긴 재킷을 입고 온 그는 이따금 땀을 훔치며, 후쿠시마 이후의 시간이란 주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설득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아침을 시작하는 강연으로는 침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는 간곡했고, 모두 그의 말에 전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사태이후 자신의 학문적인 여정이 마침내 전환을 이룰 수밖에 없었음을 역설했다.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수긍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군가에게 삶 전체를 휘젓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법이고, 그것을 역설하는 일 역시 당연한 일이잖은가. 그러나 나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환기하는 그 말할 수 없음 혹은 감당할 수 없음이라는 무한한 위협, 그래서 더욱 매력적일수도 있을 그 위험에 향해진 경악보다 더 새삼스러운 것이 있는 듯 생각됐다.
그것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모두에게 거의 공평하게 안겨지는 것처럼 보이는 재앙을 통해서라는 것 때문이었다. 내게는 그것이 기묘하고 거북한 일처럼 느껴졌다.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그리 생소한 일도 아니다. 블록버스터 재난영화를 떠올리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는 재앙 앞에서 거의 삽시간에 기적처럼 하나가 된다. 그 ‘하나’란 물론 ‘모두 함께 죽을 운명’이라는 자각을 통해 싹 튼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국은 산산 조각난 것처럼 보이던, 어떤 수를 써도 파악하기 어렵던 하나 된 세계를, 투명하리만치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는 어차피 모두를 묶어주는, 모두가 소속된 하나의 세계 따위란 있지 않다고 냉소하기 일쑤이다. 그렇지만 재앙은 우리에게 하나란 것을 일깨운다. 파국의 운명이 불러일으키는 기적이라고나 해야 할까. 우리는 서로가 다른 이해관계와 패거리 의식으로 분할되어 있을 뿐 서로를 묶어주는 그 어떤 끈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를, 파국 앞에서 갑자기 멈춘다.
철학은 그것을 상상력의 문제라고 부른다. 상상은 머릿속에서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이런저런 잡다한 공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이들을 하나인 무엇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렇지만 그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힘을 종교로부터 박탈한 이후 그 역할은 과학이 가로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설이지만 후쿠시마의 재앙은 그 어떤 과학적 지식과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 과학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해결 불가능한 재앙으로 알려진 재앙이기도 하다. 그처럼 과학은 우리에게 은연중에 재앙과 파국이란 신종 예언을 통해 우리를 공동의 운명에 묶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상력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충격을 통해 촉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상하는 자를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임을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상상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언가로 인해 우리는 상상력을 촉발 받지만 상상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온전히 그 사람(들)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너무 플라톤적인 생각일까, 나는 바로 정치가 공동의 운명에 속하고 있음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정치가 제 역할을 하기를 멈출 때 우리는 공동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상상력을 다른 것에 양보한다. 물론 그것은 공동의 운명을 창립하는 사람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자신들을 공동의 피해자로 묶어주는 공포로 인해 떠오르는 수척한 세계일뿐이다. 한동안 우리가 그런 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후쿠시마 사태보다 더 심란한 일이라는 것은, 부디 나만의 생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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