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은행에서 투자은행(IB) 기능을 분리해야 한다."
대형 은행의 무분별한 투자를 우려하는 비판론자들이 늘 하는 얘기다. 그러나 세계 최대은행의 전 최고경영자(CEO)가 이렇게 말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1999년 상업은행(CB)과 IB의 겸업을 금지한 글래스-스티걸법의 폐지를 이끌며 대형 은행이 '백화점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했다면 월가에 대한 변절 또는 배신으로 봐도 무방하다.
발언의 주인공은 샌디 웨일(79ㆍ사진) 전 씨티그룹 CEO다. 웨일은 25일 미국 CNBC방송에 출연해 "우리가 할 일은 은행에서 IB를 분리하는 것"이라며 "은행은 예금을 유치해 상업 대출이나 부동산 대출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이 예금 및 단기대출 업무인 CB 기능만 해야지 기업 장기대출이나 인수합병(M&A)에 관여하는 IB 업무를 하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친정인 씨티는 물론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대형 은행을 해체하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55년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에 입사해 월가에 입문한 웨일은 98년 증권ㆍ보험사 트래블러스와 씨티의 합병을 주도했다. 금융업 경계 분리를 규정한 글래스-스티걸법이 살아 있던 시절이었으나 웨일은 제럴드 포드(공화당) 전 대통령, 로버트 루빈(민주당) 전 재무장관 등 거물을 이사로 영입해 법의 폐기를 이끌어 냈다. 이후 대형 은행은 예대 업무와 더불어 증권ㆍ보험 등의 영역에 발을 들이며 거대 은행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웨일의 발언은 월가에 큰 충격을 줬다. 웨일과 함께 초대형 은행 신봉자로 꼽혔던 윌리엄 해리슨(69) 전 JP모건체이스 CEO는 "IB와 CB의 결합이 은행을 안정적으로 만든다"며 "둘의 분리는 재앙"이라고 반박했다. 해리슨은 2004년 케미컬은행, 체이스 맨해튼, JP모건 등을 합병해 현재의 JP모건체이스를 만든 인물이다.
웨일은 입장을 바꾼 이유에 대해 "이전 모델(IB와 CB의 결합)은 그 시절에나 적합했으며 지금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웨일은 2006년 씨티그룹 회장에서 물러난 뒤 2억5,000만달러를 모교인 코넬대에 기부하는 등 자선활동을 해왔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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