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수는 그가 말한대로 이틀 뒤에 한양을 떠났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해마다 추석 전후에 전주에 머물 것이니 향청에 와서 이방에게 자신의 행방을 물으라고 일러주었다. 다시 세월은 물처럼 흘러 가을이 지나가더니 동지 무렵의 초겨울이 다가왔다. 신통이 여느 때처럼 오후에 구리개 약방에 책 읽으러 들렀더니 주인이 말했다.
자네 매제인가 하는 사람이 찾아왔더군.
신통은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고 고기 눈이 벙벙해져서 주인 의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매제라면 하나밖에 없는 누이 덕이의 남편이라는 말일 터인즉 집안 소식에 전혀 깜깜하던 신통으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손님들이 모이고 신통이 최근에 새로 사들인 언패소설책 『박씨전』을 읽는데 시대 배경이 임진왜란 때의 일이라 모두들 재미가 진진하여 숨을 죽이고 들었다. 그는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한 장면이 끝나면 몇 호흡을 쉬었다가 청중의 기미를 한 번씩 주욱 살피던 것이었는데, 방금 누군가 미닫이를 열고 들어와 문가에 살그머니 앉는 걸 보았다. 그는 아버지 이지언 의원의 조수인 송 생이었다. 서당에서 신통과 그의 형 준과 더불어 셋이서 무릎을 맞대고 공부하면서도 늘 송 생이라고만 불러서 그의 이름을 막상 생각해보면 가물가물하였다. 그는 훈장인 송 초시의 아들로 아버지 이지언은 신통이 아니라 그에게 의업을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경이 송 생의 이름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신통은 그가 나타난 뒤로 엄벙덤벙 읽어치우고는 불평하는 손님들을 뒤로 하고 약방을 나섰다. 그는 우경이를 데리고 구리개 부근 주점으로 가서 함께 술과 밥을 먹었다. 신통은 두 살 아래인 송 생을 늘 막내둥이처럼 대하는데 먼저 궁금한 점을 물었다.
나 있는 델 어찌 찾아냈니?
보은 집에 들르는 약재상이 한양에 올라갔다가 언니를 보았다구 그럽디다. 구리개 수세보원 약방에서 신통방통이란 별호를 내세워 전기수질을 하구 있다구요.
신통이 잠깐 생각해보니 지난 가을엔가 그가 책읽기를 마치고 나서자 손님 중에 누군가가 따라나오며 말을 걸었던 게 생각났다. 그가 보은 사람이라고 하여 그러려니 했을 뿐 신통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그 사람은 읍내에서 신통이 소년 시절에 책을 낭독하던 자리에 몇 번이나 참례하였노라고 말했고 그에게 술까지 사고 헤어진 적이 있었다.
헌데 니가 언제 내 매제가 되었단 말이냐?
헤헤, 그건……
우경이는 뒤통수를 득득 긁더니 덧붙였다.
의원님이 명년에는 덕이와 혼인시켜준다구 해서요.
그래? 참 별일이로구나. 지금 그 상투는 분명히 가짜인 셈이구.
신통이 슬슬 건드려 먹는데도 우경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솔직하게 말했다.
한양 먼길을 오는데 아무래두 떠꺼머리를 해가지고는 얘, 쟤 하며 하대나 받기 십상이지요. 미리 외상으루 장가를 들었다 칩시다.
그래, 한양에는 무슨 일로 왔니?
언니를 잡으러 왔지요. 헌데 아무리 집에 정이 없단들 가내 두루 평안하신가, 한마디를 못 한단 말요?
신통은 할말이 없어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할 뿐이었고 우경이는 농담조를 싹 거두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머님이 앓으시구, 형수도 산달이 가까웠지요. 이제 해를 넘기기 전에 저하구 같이 내려가십시다.
이신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내는 혼인하고 이내 애가 들어선 모양이지만 지금 와서는 얼굴도 뚜렷하지 않을 만큼 기억이 희미했다. 그가 떠나기 전에 할말이 없어 생뚱맞게 그녀의 친정집 마당에 섰던 석류나무가 좋아 보였다고 말했던 것과, 자신을 배웅해주던 금산댁의 희부연한 자태만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의원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언니를 보았다는 소문을 들으시자 마자 절더러 당장 서울 가서 끌고 내려오라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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