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현지시간) 오전 프랑스 대통령관저인 파리 엘리제궁.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계단 앞까지 나와 에드 밀리밴드 영국 노동당 당수를 맞았다. 이 짧은 장면에는 이념과 인연으로 얽힌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미묘한 관계가 녹아 있다.
올랑드의 이날 행동은 외교 관례를 깬 것이다. 프랑스 대통령은 통상 다른 나라 정상이 방문할 때만 엘리제궁 앞으로 마중을 나가고 야당 지도자를 만날 때는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비공개 회동을 한다. 밀리밴드는 올랑드 당선 이후 처음 엘리제궁을 방문한 영국 정치인이 됐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10일 런던에서 올랑드와 정상회담을 했지만 엘리제궁을 방문하지는 못했다.
올랑드의 밀리밴드 환대는 중도좌파 지도자들의 우애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전했다. 이날 밀리밴드는, 사회당 출신으로는 17년 만에 집권한 올랑드의 좌파적 정책에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밝혔다. 밀리밴드는 35분에 걸친 회동을 마친 뒤 "유럽 경제위기 해결을 위해 성장 정책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했다"며 "우파 정치인들이 추구하던 긴축 대신 성장으로 흐름이 전환하고 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가을 파리에서 유럽 좌파지도자 회의를 열기로 했다.
올랑드에게 이날 만남은 캐머런에 대한 '복수'의 의미도 있다. 올랑드가 2월 후보 자격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캐머런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 반면 밀리밴드는 올랑드를 당수 사무실로 초청해 오찬을 나눴다.
후보 올랑드를 외면했던 캐머런은 그러나 미트 롬니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와는 26일 총리관저에서 만날 예정이다. 올랑드 방문 때와 기준이 달라진 것에 대해 총리실 대변인은 "직위에 대한 규정은 앞으로도 적용될 것"이라고 밝혀 롬니와의 만남이 예외적인 것임을 시사했다. 인디펜던트는 캐머런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외교적 모험을 감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올랑드와 밀리밴드의 경우처럼 캐머런과 롬니의 격에 맞지 앉는 회동도 이념적 성격이 짙다. 텔레그래프는 "오바마는 캐머런 정부에 좌파적 냉담함을 보였지만 공화당 소속의 롬니는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전했으며 가디언은 영국 보수당과 미국 공화당을 '자매 정당'이라고 표현했다.
이제 관심은 올랑드가 밀리밴드에게 했듯이, 캐머런이 외교 관례를 벗어나 다우닝가 총리관저 문 앞에서 롬니를 영접하느냐에 쏠린다. 2008년 노동당 출신의 고든 브라운 당시 영국 총리는 미국 민주당 후보로 영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를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현관에서 만나지 않았으며 총리 관저 정원에서 대화하는 사진만 공개했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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