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포기(懷才抱奇)의 불우(不遇)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기상으로 헤쳐 역경을 돌려 진취(進就)의 밑바대로 삼았으니 뜻있는 이가 기리는 바이다."
국내 중진 한문학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가 23일 별세한 자신의 스승인 김도련(79) 국민대 명예교수를 위해 쓴 묘갈명(墓碣銘) 중 일부다. 묘갈명이란 묘비(墓碑)에 새겨진 죽은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한 글로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묘갈명을 부탁하면, 제자는 정성을 다해 묘갈명을 지었다.
한학의 대가로 꼽히는 김 교수는 사실상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독학으로 한문학 외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1933년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학으로 한학에 매진, 1968년 국사편찬위원회 교서원에 합격했으며 서울대, 연세대, 국민대 등에 강의를 나갔다. 그의 실력을 높이 산 국민대는 1979년 그를 교수로 채용했다.
고인은 정민 교수와 인연이 깊다. 정 교수가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고문 논문을 쓸 때였다. 고인은 1993년 정민 교수와 1년 남짓 공동 작업을 벌여 한국 애정 한시 평설집인 '꽃 피자 어데선가 바람불어와'에 이어 '통감절요'를 읽고 번역해 책으로 출간했다. 현재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연구중인 정민 교수는 24일 "5년 동안 주말마다 선생님 댁에 찾아가 배우고 같이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끼니도 잇기 어렵던 시절 고인의 부모님이 제사 때 쓰려고 남겨둔 마지막 쌀을 팔아 고인에게 '논어'를 사준 일화도 소개했다.
"스승님께서는'이 책을 만냥짜리 책으로 읽으면 만냥짜리가 될 터이고 한냥짜리 책으로 읽으면 그저 한냥짜리가 될 것일세'라고 한 아버님의 말씀을 잊지 못해 이 '논어'를 만냥짜리 책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다짐을 하고 또 하셨답니다."그로부터 47년 뒤인 1990년 5월 고인은 '논어'를 번역해 책으로 냈다.
정 교수는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고전 문장에 대한 연구를 여신 분"이라며 스승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김 교수는 지병으로 10년 가까이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투병을 해왔다.
정 교수는 묘갈명에서 "소학교 졸업의 학력에도 이례(異例)로 발탁되어 민족문화추진회와 국민대 중문과 교수를 역임한 뒤 정년퇴임의 영예를 맞았으니 보기 드문 일"이라고 썼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 오전 7시, 장지는 충남 예산 화산추모공원. 1577-0083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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