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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시간을 세우고 공간으로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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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시간을 세우고 공간으로 덮는다

입력
2012.07.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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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 은 우주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천지현황(天地玄黃)우주홍황(宇宙洪荒)이 그것이다. 원래 이 구절은 <주역> 에서 나온 말로, "하늘은 위에서 덮이니 그 색이 검고, 땅은 아래에서 쌓이니 그 색이 누렇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천지현황'이 아니라 '천현지황'이 되어야 정확하다. 어쨌든 천지가 생겼다. 그리고 다시 천지를 가로 세로로 나눈다. 즉 천지의 안을 가로로 보면 동서남북과 아래 위가 생긴다. 그리고 세로로 보면 옛날과 지금이 생긴다. '우주홍황'이란 우주는 넓고 넓어서 막다른 데가 없고, 끝도 없고 더함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우주홍황'은 '우홍주황'으로 표현해야 이해가 쉽다. 그런데 이렇게 천지는 어떻고, 우주는 어떻다로 문장구성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유덕화와 오천련이 열연한 '천장지구'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도덕경> 에 나오는 말이다. 천장지구(天長地久)는 하늘과 땅은 넓고 오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천구지장지(天久地長)가 되어야 맞다. 왜냐하면 천(天)은 시간을 뜻하므로 오래되다, 혹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로 서술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地)는 공간을 뜻하므로 막다른데가 없이 넓다고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덕경에서는 이것을 뒤섞어 놓았다. 시간을 공간의 의미와 공간을 시간의 의미와 나란히 자리잡게 했다. 이것이 한문의 묘미인데, 문법규칙 보다는 의미의 표현에 주목하는 것이다. '천구지장'이 '천장지구'가 되면서 이 간단한 4자 안에서 시공간이 씨줄과 날줄로 얽히며 질서를 잡고 세계를 재현하고 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천지현황 우주홍황'도 쉽게 이해가 된다. 우리는 저 간단한 문장으로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가 시간과 공간으로 덮혀있고 펼쳐있다는 구성원리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우주의 모습을 상상 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천지는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모습이며, 우주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천(天)은 시간이고, 지(地)는 공간이며, 천지(天地)는 시간과 공간이 결합해서 꾸미는 이 세계의 모습이다. 우(宇)는 공간이고, 주(宙)는 시간이며, 우주(宇宙)는 막다른데가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원리이다.

물리학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3차원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3차원 공간에 시간을 더한 4차원 시공간에서 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둘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의 집도 그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집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동굴이다. 동굴에서 벗어나오면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무를 세워 둘러서 뼈대를 만들고, 거기다가 짐승가죽을 덮어 비와 바람으로부터 보호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원초적인 형태는 목재로 뼈대를 만들고, 거기에 벽과 지붕을 치고 덮는 가구식 구조로 변화했다. 이것이 조선집이다. 이 가구식 구조는 기초와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보를 잡고, 지붕을 올리기 위한 서까래를 친다. 여기까지가 우리 몸으로 말하면 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뼈대가 바로 시간(宙)이다. 그리고 기둥과 기둥의 빈 공간에 벽을 치고, 기와를 올려 지붕을 덮는다. 이것이 바로 공간(宇)이다. 조선집은 시간이라는 구조를 세우고, 거기에 공간을 치며 완성되는 것이다. 조선집의 대청마루에 들어서면 우리는 이 구조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다. 천정으로 촘촘이 빗세워진 서까래들은 시간을 상징하며 그 위로 덮인 회벽이 칠해진 지붕 부분은 공간을 상징한다. 굳이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조선집은 밖에서 보아도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시간의 기둥이 밖에서도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막고 있는 벽은 공간을 상징한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위에서도 사방에서도 조선집은 한결같이 시공간이 결합한 우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집은 작은 우주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주를 축소해 놓았다는 말이 아니다. 집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집은 그것을 가장 밝게, 모든 것을 보여준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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