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김연수 지음/마음의숲 발행ㆍ298쪽ㆍ1만2,000원
어린 시절 축구 경기를 보며 "졌다, 졌어. 진거야"라고 읊조리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작가는 당시 참으로 기이했다고 한다. 패자가 되는 불안을 떨치기 위해 걸쳐 입은 거대한 '체념의 세계관'. 거기에 눌려 작가는 모든 스포츠를 경멸하게 됐는데, 딱 하나는 예외였다. 반드시 이기지 않더라도 끝까지 완주하면 되는 달리기였다.
새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 에서 소설가 김연수는 자신의 경험담을 펼쳐 놓으며, 달리기 같은 인생에서는 애써 이기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 하다. 유년 시절부터 중년인 지금까지 보고 겪어온 주변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단상은 그가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는 데 천부적인 촉수를 지닌 작가라는 걸 다시 한번 증명한다. 지지>
명절이 대목이라는 것을 아는 빵집 아들의 국민학생 때부터, 울컥 터지는 울음을 누르려고 서점에 간 고교 시절의 추억, 거의 1년 간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성실하게 번역에 매달린 책이 출판되지 못해 좌절한 '백수' 시기, 도라에몽에 목을 매는 딸을 둔 아버지가 된 지금까지 작가의 인생 궤적은 흥미롭다.
아무 데나 책을 두 번 펼치면 한 번 쯤 나오는 달리기 이야기에는 이런 유머도 담겼다. '몸을 움직여 뛰는 행위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달리고 싶어서 달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강요로 억지로 달리는 일이다. 전자를 '달리기'라고, 후자를 '후달리기'라고 하자.'(84쪽)
열 편 넘는 소설집과 여러편의 산문집을 낸 작가의 감수성은 나이가 들면서 더 산뜻해지는 것 같다. 새로 마음을 끄는 음악이 나오면 금방 전 유행가를 버리는 '쿨한 귀'를 지조 없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좋아하자.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 텐데, 그때는 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고 말한다.
찌는 듯 무더운 8월 대만 여행에 한숨 푹푹 내쉬면서도 '나흘 뒤면 끝난다는 걸 알고 있으니 웃으며 견딜 수 있었다'는 여유. 작가는 '우리가 삶의 사소한 부분들을 무시하고 굵직굵직한 것들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다가 결국 후회하면서 죽는'다며 인생의 사소한 부분을 사랑하라고 일러준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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