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화계를 상징해온 충무로에서 요즘 영화계 인사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벤처열풍이 불던 2000년대 초 대다수 영화제작사들이 서울 강남지역이나 홍대 앞 등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탈 충무로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기 고양시가 국내 영화산업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19일 (재)고양지식정보산업진흥원과 영화계에 따르면 2000년대 후반 고양에 방송영상기업들을 위한 브로멕스타워들이 조성되며 굵직한 영화제작사와 거장들의 러시가 시작됐다. '은행나무 침대' '엽기적인 그녀'를 만든 ㈜신씨네, '왕의 남자'를 제작한 ㈜영화사아침, '공동경비구역JSA'와 '올드보이'를 연출한 박찬욱 감독의 ㈜모호필름이 고양을 거점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살인의 추억' '괴물'의 봉준호 감독, '놈놈놈'의 김지운 감독,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감독들도 고양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한다.
고양시에 둥지를 튼 후반작업 업체들의 면면도 막강하다. 우리나라 영화 컴퓨터그래픽(CG)업계 1, 2위로 거의 대부분 작품의 CG를 처리하는 ㈜디지털아이디어와 ㈜CJ파워캐스트가 고양에서 활동중이다. '아저씨' '건축학개론' 등 한 해 3편 이상의 히트작을 편집하는 ㈜김상범편집실을 비롯해 이름깨나 알려진 후반작업 업체들도 최근 몇 년 사이 대거 고양으로 몰려왔다.
과거 제작은 충무로, 후반작업은 서울 강남이나 남양주종합촬영소 등으로 나뉘어 이뤄져 온 국내 영화제작 시스템이 이젠 한 공간으로 일원화된 것이다. 여기에 고양시는 기업 당 최대 5억원까지 콘텐츠 개발 자금에 대한 신용보증을 지원하고, 폐정수장을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중촬영장으로 리모델링해 영화제작사들을 유혹하고 있다. 오정훈 고양지식정보산업진흥원 차장은 "고양시가 적극적인데다 서울보다 저렴한 임대료와 편리한 교통, 영화 관련업체들이 집중돼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 등이 좋은 반응을 얻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영화 관련업체들이 한데 모이다 보니 고양시는 로케이션 장소로도 주가를 올리고 있다. '마이웨이' '최종병기 활' '퀵' '7광구' 등 지난해 개봉한 한국영화 53편 중 20편이 고양에서 촬영을 했고, 올해에도 '은교' '도둑들' 등 14편이 촬영을 마쳤거나 진행 중이다.
서울 중구청에 따르면 충무로 영화제작사는 현재 240개나 되지만 이중 제대로 된 작품을 발표하는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영화사 등록은 행정적으로 구청 신고사항으로 이름만 걸어 놓은 회사도 많아 통계 자체에 신뢰도가 떨어진다. 영화계에서는 실질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들이 주로 고양시와 홍대 앞, 상암DMC에 권역을 형성한 것으로 파악한다.
영화계 종사자들은 화려했던 충무로 시대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대규모로 이뤄져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야 하는 현 제작시스템은 땅값이 비싸고 혼잡한 충무로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3년 전 고양시로 터전을 옮긴 영화사아침의 이정세 대표도 이런 현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이 대표는 "예전에는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을 1초라도 고치려면 후반작업 업체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느라 하루가 다 갔지만 이제는 한 공간에 있어 훨씬 수월하게 작업한다"며 "시간과 비용 절감은 말할 것도 없고 수시로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어 창작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양=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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