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가 1987년 대한항공(KAL) 858편 폭파사건에 관한 외교문서 57건을 비밀유지기한 조기 해제를 통해 전격 공개했다.
18일(현지시간) 본보 취재 결과 미 국무부는 아무런 예고없이 지난달 11일 홈페이지에 57건의 외교문서를 올려 놓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는 세차례 진행된 국무부 내부심사에서 최대 2023년 이후 공개하도록 결정된 비밀문서들이다. 국무부는 비밀문서들을 11년 가까이 앞당겨 공개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개 시점이 사건 주범 김현희(50)가 참여정부가 자신을 가짜로 몰았다고 폭로한 시기와 맞물려 있어 주목된다. 관련기사 3면
57건의 외교문서는 KAL기 폭파 다음날인 87년 11월30일부터 김현희에 대한 특별사면이 이뤄진 90년 4월까지 서울과 도쿄(東京), 베이징(北京)의 미 대사관과 워싱턴이 주고받은 비밀 외교전문 및 비공개 국무부 내부 문서들이다. 모두 200여 쪽에 달하는 문서의 상당수는 국가안보와 정보원 보호를 이유로 곳곳이 지워진 채 공개됐다. 하지만 문서들에는 KAL기 폭파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증거들이 많아 일각에서 제기하는 '김현희 가짜설'또는 'KAL기 폭파 자작극설'을 반박할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KAL기 폭파사건을 자체 조사해 북한의 테러 개입 증거를 확보한 뒤 관련 사실을 구소련은 물론 외교채널을 통해 북한에도 전달했다. 한국 정부도 중국과 구소련에 진상조사 결과를 사전 통보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의 추가도발 방지를 위한 조치"라고 미국에 설명했다. 그러나 사건 초기 한국 정부는 대선에서 여당 후보에 유리한 범행을 북한이 감행한 배경을 놓고 혼란스러워 했다.
미국은 해외방송청취기관(FBIS)을 통해 김현희의 말을 분석하는 한편, 대면 조사에서 그가 접촉한 북한 해외 고정간첩을 지목하도록 하는 방법 등의 독자적인 조사를 벌인 끝에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란 결론을 내렸다.
주한 미 대사관은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한국의) 일부 북한 옹호론자들은 KAL기 폭파가 안기부 요원인 김현희와 한국정부의 음모에 의한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전 대통령은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 대사와 대화에서 "김일성ㆍ정일 부자는 정신상태가 병적이고 어쩔 도리가 없는 사람들"이라며 "군사보복이 당연하지만 정권교체기이고 서울올림픽을 앞둔 때라 그리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외교문서는 적었다. 또 한국은 KAL기 사건을 계기로 구소련 등 공산권과 실질적인 관계진전을 끌어내 90년대 전개된 북방외교의 디딤돌을 놓았다고 미국은 평가했다. 김현희는 서울 압송 이후 한시(漢詩)까지 읊으며 중국인 행세를 했으나, 북한에서 훈련받은 대로 침상을 정리하는 버릇 때문에 '꼬리'가 잡힌 것으로 드러났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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