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대선을 앞둔 여야의 의제 선점 경쟁이 뜨겁다. 한동안 무상보육 확대를 비롯한 복지정책으로 열을 올리더니 요즘은 '경제민주화' 정책 공약을 다투기에 여념이 없다. 여야가 상대방 주장의 허점을 파헤쳐 비난하느라 바쁜 와중에 같은 당 내에서까지 서로 "뭘 모른다"고 쥐어뜯는다. 경제민주화 논의에 한마디 걸치지 못하다가는 무지렁이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게 싫어서라도 그 동안의 논의 내용은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지만, 솔직히 처음에 그랬듯 지금도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귀에 껄끄럽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은 경제민주화를 민주화의 최종 단계인 사회민주화와 같은 뜻으로 보면서 소득 재분배 등을 통한 경제적 평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1987년 헌법 개정에서 신설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119조 2항에도 비슷한 인식이 이어졌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이런 '경제민주화' 인식은 의외로 한국적이다. 영미에서 '민주화(Democratization)'는 정치적 의미에 한정해 쓰이고, 경제적 재분배나 사회정의의 문제는 '민주화' 대신 '정의'나 '분배''계급' 등을 곧바로 쓴다. 일본도 대체로 비슷하다.
그럴 만한 배경은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던 기억과 민주화 이후 절대선화한 민주주의ㆍ 민주화 인식 등이다. 그 결과 모든 이상적 상태나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변화 과정이 '민주화' 그릇에 담겼다. 70ㆍ80년대의 사회변혁 운동, 심지어 체제전복을 꿈꾼 급진적 운동까지 '민주화 운동'이 된 게 좋은 예다.
이런 경제민주화 인식이 구체적 역사와 시대의 산물임은 1952년 9월17일자 <경향신문> 사설 '경제민주화를 위하여'가 똑똑히 보여준다. 사설은 경제민주화를 현재의 일반적 인식과 정반대인'정치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서 벗어난 경제주체의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보았다. 같은 말이 시대마다 다른 뜻으로 여겨지고 쓰이는 게 특별히 나쁠 건 없다. 다만 계급과 갈등, 정의와 혁명을 직접 말한다고 경찰이 출동할 일도 없는 시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발상법이 어색하다. 경향신문>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더욱 구체적 허점을 안고 있다. 내용이 적잖이 다른데도 똑같은 말을 쓰는 것은 다른 딱딱한 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민주화'의 인기 때문이라고 치자. 그래도 과대 포장이나 허위 포장은 곤란하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은 대부분 관련 법제가 정비돼 있고, 감시망의 효율적 가동만이 문제인 공정거래나 사회적 약자 보호에 치중해 있다. 이 또한 중요한 과제지만 거창하게 경제민주화로 포장할 건 아니다. 이런 지적이 귀가 따가웠던지, 최근 재벌 총수의 배임ㆍ횡령죄에 대한 법정형을 끌어올려 집행유예 선고를 어렵게 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내놓았지만 위헌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민주당의 차별화 전략의 핵심인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 부활이나 순환출자 금지, 금융ㆍ산업자본 분리(금산분리) 강화 등의 지향점은 경제민주화 그릇에 담을 만하지만, 구체적 현실에 비추어 그 지향에 부합하는 결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가령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한 출총제가 중소업체를 위협하는 소규모 투자는 못 막고, 국민경제 발전에 긴요한 대형투자만 가로막을 것이란 진단 등이 그저 나온 게 아니다. 단기간에 재벌의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기도 어렵고, 총수의 재벌 지배의 주된 요인이 주식회사의 '주권자'인 대다수 주주의 무관심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지배구조 개선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오히려 재벌에 팽배한 '총수 권위주의'를 흔드는 데는 여당이 내놓은 연기금 주주권 행사 의무화가 더 효과적이다. 실제 결과보다는 유권자와 재벌의 심리를 겨냥한 '재벌 때리기'라면 이 또한 경제민주화 그릇에 어울리지 않는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정치권이 복잡하게 말을 돌리지 않기를 바란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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