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아버지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뜀박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분홍색 야광반바지에 여위고 털 많은 다리를 가지고 있다.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무릎을 높이 들고 뛰는 아버지의 모습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규칙을 엄수하는 관리의 얼굴처럼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내 상상 속의 아버지는 십수 년째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그 표정과 자세는 늘 변함이 없다. 아버지는 벌게진 얼굴 위로 황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아버지 얼굴 위에 일부러 붙여놓은 못 그린 그림 같다.('달려라, 아비' 중에서)
아버지가 뛰는 장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딸은 오래 전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에서 뛰는 아버지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를 계속 뛰게 한다. 어머니의 부풀어오르는 배를 보고 얼굴이 점점 하얘지다가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말이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는 1980년생인 작가의 첫 소설집 표제작으로 10년째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소설가 김애란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아버지에 대한 문학적 조명이 새삼스러운 것은 물론 아니다. 소설가 김소진도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며 초라한 아버지를 작품 속으로 불러냈다. 김소진의 아버지는 '아비는 남로당원이었다' '아비는 종이었다'며 옛날 작가들이 그려낸 아버지상과의 단절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화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아버지'가 원망의 대상이기는 김애란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유복자처럼 만들거나('달려라, 아비'), 무책임하게 놀이공원에 자식을 버리거나('사랑의 인사'), 집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면서 TV 중독으로 딸의 수면까지 방해한다('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는 상상 속에서 복수를 할지라도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구나' 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나아가 우스꽝스러워서 원한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그에게도 아버지는 충분히 원망 살 만한 존재이지만, 그는 애써 원망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대신 희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렸다. 만화 같은 상상력이다.
"근사한 아버지, 무서운 아버지 말고요. 웃기는 아버지는 어떨까 생각했어요. 직접 포옹하지 않고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좋은 방법이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던지는 거잖아요. 그냥 친구 같은 아버지를 그리고 싶었어요."
"뛰는 아버지 상상만 해도 흐뭇해"
김애란의 우스꽝스러운 아버지 이야기는 인천 달동네에서 펼쳐진 작가 부모의 과거사에도 일부 빚지고 있다. "소설 속의 설정은 서울이지만, 실은 저희 부모님이 처음 살림을 시작한 인천의 한 달동네가 무대에요. 그런데 지금도 남아 있을까요."
소설 속 젊은 남자는 먼저 상경한 애인을 따라 가출을 감행해 단칸방에 들이닥친 여자친구에게 며칠간 한 이불에서 자자고 애원과 짜증과 허세를 부리다, 마침내 당장 피임약을 사온다면 허락하겠다는 말에, 달동네 맨 꼭대기에서 약국이 있는 시내까지 한달음에 내달린다. 기대에 달떠 벌개진 얼굴로 뛰고 또 뛰어 계단을 넘고, 어둠을 가르며 바람보다 빨리 뛰다 연탄재에 발이 걸려 넘어져 온몸에 하얀 재를 뒤집어써도 벌떡 일어나는 그 남자가 죽어라 뛰었던 골목을 찾아 작가와 함께 나섰다.
인천시 송현동 수도국산 인근. 수도국산은 일제강점기 통감부가 송림산을 바꿔 부른 이름이다. 수도국을 신설해 인천 송림산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에 공급할 수돗물을 보관할 배수지를 건설한 데서 유래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이, 1960, 70년대 이후에는 지방서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사람들이 모여 인천에서도 소문난 달동네였다. 드문드문 흙담 무너진 집들을 빼면 지금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고 현대식 양옥이 즐비해 달동네는 자취를 감추었다. '달려라, 아비'에는 작가의 가족 이야기 일부가 투영돼 있다. 충남 서산 출신인 아버지가 일자리를 구해 배편으로 인천으로 옮겨오고, 그런 아버지에게 신세 좀 지자며 주소 적은 쪽지 하나 달랑 들고 어머니가 뒤따라 올라온 뒤 앞에 사정처럼 이야기가 전개됐다.
기억에 없지만 자신의 원형(原形)처럼 느껴진다는 陋殆?도착한 작가는 두리번대다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들의 이미지는 정적이잖아요. 온 힘을 다해 뛰는 건강한 모습을 생각하니 어쩐지 아버지에게 청춘을 돌려주는 기분이에요." 대처에서 막막하게 새 인생을 시작했을 젊은 부모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기보다 인생에서 제일 젊고 건강했을 한때를 돌려 준 것 같다는, 밉지 않은 '아전인수'고 '자기만족'이다.
산동네가 한눈에 들어오는 꼭대기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 있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한때 이곳에서 판자 지붕 맞대고 아웅다웅 살았다는 증표다. "그래도 흔적이 좀 있어서 다행이에요. 뭔가 잘 될 거야 하는 희망을 갖고 대도시로 왔을 젊은 내 엄마 아빠의 '근거 없는 낙관'을 만난 기분이랄까. 열살 즈음 엄마 손을 잡고 한번 가까이 지낸 아주머니 댁에 다니러 온 적이 있었어요. 높고 구불구불하고 계단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런데 제 키가 커서인지 그리 높지 않네요.(웃음)"
이방에서 저방으로… 방살이도 낙관
작가의 부모는 3, 4년 이 근처에서 "이방에서 저방으로 옮겨 다니며" 딸 셋을 낳았다. 1979년생 언니에 80년생 작가와 쌍둥이 언니까지 간난쟁이 셋이 싸고, 싸고, 또 싸고 했으니 그 기저귀 빨래가 얼마나 많았을까. "세 사는 처지에 기저귀 빨래가 하도 많아 주인집에 빨랫줄 쓰는 눈치가 많이 보였다"던 어머니는 송현동에 잠시 도화동에 잠시 그렇게 몇 번을 이사 다니다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서산행을 택했다. 그 덕분(?)에 작가는 목욕탕 하나, 중학교 하나, 10분쯤 걸으면 읍내 횡단이 끝나는 곳에서 "시골사람"으로 자랐다.
"모든 것의 출발이 여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는 그렇잖아요. 부모는 그냥 부모지, 뭘 하고 싶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잖아요. 저도 그랬는데 성년이 지나고 나니 궁금해졌어요." 대학 시절 서산에서 칼국수집을 하던 "어머니 가게에서 함께 파를 까다가" 이 소설의 힌트를 얻었다.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도운답시고 쫑알쫑알 하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니 아버지가 그때 피임약을 사러 열심히 뛰어갔다 왔다고.(하하)"
소설과 달리 작가의 아버지는 도망가지 않았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현재 성실하게 서산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다. "점잖고 말수가 적은 편이세요.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빈 도화지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거기 있는 그림들을 다시 기억해서 그리거나 해석하거나 바라본다면 저는 그림 자체를 새로 그려야 하는 느낌. 그러다 보니 조금은 허공에 붕 뜬 만화 같은 소설 속 캐릭터가 나온 것 같아요."
대신 강인함과 여유를 가진 어머니가 있었다. 건강이 나빠져 장사를 접기까지 작가의 어머니는 칼국수집을 20년 넘게 꾸릴 정도로 바지런했다. "엄마 성격이 제 작품 속 엄마들의 성격이랑 많이 비슷하죠. 지금이야 시간도 많이 지나고 이런저런 일 많이 겪어서 젊었을 때보다 조금 지치시긴 했지만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지?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도 농담을 잘 하시는 분이에요." 소설 속에서 농담처럼 아찔한 상황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능력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것일 테다.
김애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좌절할만한 숱한 순간에도 잠시 실의에 빠질지언정 자신이 발 디디고 선 곳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모가 인천 달동네의 이방 저방으로 옮겨 다녔듯,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쌍둥이 언니와 함께 시작한 자취생활 역시 이방에서 저방으로 이사의 연속이었다. "한 12년? 작년에 결혼하기 전까지 자취를 하며 7, 8번쯤이사 다닌 것 같아요. 자취생들이 다 그럴 텐데요 뭘." 이런 식으로 '쿨하게 한걸음' 떼는 게 김애란식 명랑이고, 그게 그의 소설의 큰 밑천이자 장점이다.
하지만 생활력 강한 어머니와 무능한 아버지가 주요 소재라는 기사를 읽은 아버지가 난감해 한 적이 없지 않다. "딸내미가 신문에 나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어요. 그런데 이거야 원, 자랑하고 싶어도 자랑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래도 아버지께 그건 소설일 뿐이라고 설명했더니, 웃으시면서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써먹으라' 그러시더라고요."
애써 부정하지 않기로 트라우마를 극복
'달려라, 아비'는 일절 소식 없던 아버지의 부고가 당도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미국에 가서 결혼해 애까지 낳은 아버지는 이혼당하고 위자료 대신 전 부인이 결혼해 사는 집 정원을 깎아주는 한심한 인생이 되었다. 거기서 낳은 아들에게도 아비 역할을 못했다. 지금도 자기가 아버지를 잊을 수 있기를 기다린다는 이복 동생의 편지에서 주인공은 왜 아버지를 자신의 상상 속에서 계속 뛰게 했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다. 그리고 눈부신 땡볕 아래 뛰고 있는 상상 속 아버지가 얼마나 눈이 아프고 부셨을까 생각하며 선글라스를 씌워주겠다고 결심한다.
도망간 아버지를 용서하는 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가장 빠른 방법일 지 모른다. 김애란은 땅에 발 붙이고 복작복작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허황되지 않게 풀어내면서도 엉뚱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그리 심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처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가족과 궁핍이라는 쿨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명랑한 태도를 취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건강함.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 세례라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아비'를 부정하는 순간 그것이 결국 자신을 부정하는 게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진즉 알아차린 때문일까.
채지은기자
■ 혜성같은 등단… 그리고 10년
김애란 작가가 18일 새 소설집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냈다. 비행운>
"어딘가로 떠나고 있는 중이거나 떠났는데 도착하지 못했거나 하는 인물들이 나와요. 실제로 공항이 배경인 것도 있고요. 예전에는 정착하지 못한 인물들에 대해 얘기했다면 이번엔 공간이나 세대를 좀 더 확장했죠. 그런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어요."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 대해 "비행기가 지나간 후 남는 구름자국 마냥 무언가 지나간 자리들, 흔적들에 대한 이미지를 담았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책에는 '너의 여름은 어떠니''벌레들' '물속 골리앗'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하루의 축' '큐티클' '호텔 니약 따' '서른' 등 그 동안 발표한 단편 8편을 담았다.
2002년 스물둘에 대산대학문학상을 타며 등단한 김애란은 첫 소설집이 나오기도 전인 2005년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아 문단의 화제가 됐다. 당시 단편 9편을 발표했을 뿐인 햇병아리 작가를 4시간여 격론 끝에 낙점해 놓고도 심사위원들이 얼떨떨해할 정도였다. "가난에 대한 한국문학의 상상력에 작지만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듯하다"는 심사평 대로, 김애란은 도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기존 소설 속의 가난을 "자기 밖의 그 어디에도 핑계를 대지 않는 철저한 자존(自存)의 상상력"으로 끌어 올렸다.
한국일보문학상 시상식에서 "최연소라는 수사에 두리번거리지 않고 뻔뻔하고 담담하게 이 상을 받겠다"고 한 이 앙팡테리블은 과연 문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2007년 가을 불안정한 청춘들이 숨어드는 공간에 천착한 두번째 단편집 <침이 고인다> 를, 2011년 겨울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 을 내놓았다. <두근두근 내 인생> 은 17세에 조로증을 앓는 아이를 주인공 삼은 독특한 이야기로 보편성을 띄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23만부가 팔렸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침이>
평론가 신형철은 <달려라, 아비> 가 출간되자 '오늘날 문단의 불문율 중 하나는 '김애란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라며 '진보적 리얼리스트들에서부터 전위적 모더니스트들에 이르기까지, 젠체하는 비평가들에서부터 자유분방한 독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극찬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가?'라는 신형철의 말은 무슨 선지자의 예언처럼 돼 버렸고, 그 예언은 새 소설집에서도 빗나가지 않을 것 같다. 달려라,>
인천=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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