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 박근혜의 슬로건은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다. 출사표는 '변화' '희망' '행복' '소통'으로 뒤덮였다. 하나같이 좋은 말이다. 서민들 귀에 쏙 들어오고 입에 쩍쩍 들러붙는다. 박근혜는 서민들에게 미래를 심어주고 싶어한다. 꿈도 변화도 희망도 행복도 미래적 가치다. 그러나 박근혜의 미래는 공허하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치관과 말이 따로 놀기 때문이다.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박근혜는 "5ㆍ16은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유신은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5ㆍ16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던 5년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청문회 때와 비교하면 표현이 약간 윤색됐을 뿐 본질은 그대로다. 박근혜에게 5ㆍ16은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며, 유신체제는 옹호의 대상이다. 교과서에 '5ㆍ16 군사정변'으로 표기된 게 언제며, 역사가 명백히 '쿠데타'로 기록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딴소리다.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했어도 근대화를 위해서라면 정당하다는 논리에서 빈곤한 민주적 소양과 역사관이 드러난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전두환, 노태우에게 면죄부를 줬던 검찰의 망발과 뭐가 다른지 알 수가 없다. 전두환이 12ㆍ12를 당시 시대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강변하면 뭐라 반박할지도 궁금하다.
미래를 말하려면 과거를 극복해야 하는데 박근혜는 과거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질척거린다. 국민들이 알고 싶은 건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딸의 평가가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객관적 평가라는 사실을 그는 애써 외면한다.
유신체제의 평가를 국민과 역사에 맡기자는 말에는 꺼림칙한 저의가 엿보인다. 대통령이 되고 나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송두리째 뒤집지 않을까 의심스런 구석이 있다. 캠프 주변에서 '정몽주-세종대왕론' 등 온갖 해괴한 논리가 동원되는 것을 보면 능히 그러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를 보좌하는 캠프 참모 면면들을 봐도 미래라는 컨셉트와 거리가 멀다. 대부분 과거 그를 돕던 '친박'들을 재배치했을 뿐 참신한 인물이 없다. 신자유주의자,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며, 법 질서는 세운다)주의자' 일색이다. 이런 사람들이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니 위선이니 사기니 짝퉁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5년 전에 성장을 복음처럼 떠들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복지와 분배를 외치니 왜 어리둥절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캠프에서 경제민주화를 이끌고 있다는 김종인도 알고 보면 부적격자다. 재벌개혁을 이야기하면서 다 쓰러져 가는 동화은행에서 2억원의 뇌물을 받아 구속됐던 인물이다. 5공 때 국보위부터 시작해서 민정당, 민자당,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까지 안 가본 당이 없다. 전경련 부회장 출신의 현명관이나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주역인 박효종이나 나머지 충성파 인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박근혜가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를 들여다보면 지금의 공정거래제도 제대로 적용하고, 복지제도 약간 확대하고, 순환출자 제한은 조금 할 수도 있다는 정도다. 출마 연설문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제조업의 고부가가치화와 서비스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통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성장을 견인하는 쌍끌이 경제를 만들 것이며" "복지가 개개인의 역량을 뒷받침하고 끌어내서 경제와 복지가 선순환을 이루도록 하겠다." 서로 충돌하는 가치를 어떻게 조정해 가능토록 하겠다는 건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박근혜에게 발등에 떨어진 과제는 젊은층과 중도층 유권자를 끌어안는 거다. 이런 그릇된 역사인식과 친박 순혈주의, 자기중심적 사고로는 그들을 끌어안기는커녕 더 멀어지게 할 뿐이다. "불통과 소신은 구분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2040세대는 박근혜에게서 미래형 리더십 대신 권위주의의 그림자를 목도한다. 박근혜에게 이번 대선은 박근혜와의 싸움이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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