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김모(38)씨는 올해 5월 주식에 묻어놨던 돈을 모두 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반 토막이 났지만, '언젠가는 회복되겠지' 하며 버티던 증시에서 미련을 버린 것이다. 저축은행 예금도 모두 정리했다. 그렇게 마련한 5,000만원 중 3,000만원으로 주택담보대출 일부를 갚고, 나머지는 머니마켓펀드(MMF)에 넣었다. 그는 "앞으로가 걱정이라 빚은 가급적 갚고 현금은 무조건 쌓아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한달 씀씀이를 최대한 줄여 MMF 잔고를 늘리고 있다.
기업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앞으로 경기를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현금 여유가 있어도 투자에 나서기보다는 부채를 줄이는데 열심이다. 이처럼 개인이나 기업 모두 들어오는 족족 돈 나갈 구멍을 막아 돈맥경화가 심각하다.
15일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5월 광의통화(M2ㆍ현금과 단기금융상품)에서 본원통화(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돈)를 나눈 통화승수는 22.2로 2000년대 들어 최저 수준이다. 통화승수가 낮다는 건 그만큼 시중에서 돈이 도는 속도가 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중앙은행에서 돈을 풀면 시중은행의 대출이 늘고 시중통화량(M2)이 확대되는 한편 금리가 떨어져 소비와 투자가 살아난다는 경기부양 효과가 현실에선 먹히지 않는 셈이다.
이미 주식시장은 돈 가뭄 현상이 심각하다. 올해 초 7조원에 육박하던 유가증권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이달 들어 반 토막 났다. 거래대금이 4조원 밑으로 떨어진 건 2007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증시 대기자금인 고객예탁금도 1월 말 20조원에서 최근 16조원대까지 줄어 2008년 금융위기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
설상가상 기업들은 현금부족 사태에 처했다. 영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투자를 감당할 수 없어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와야 하는 형편이다. 업계에 따르면 한국전력, SK텔레콤, 삼성물산 등 20여개 국내 대표기업의 잉여현금흐름이 적자 전환한 것으로 추산됐다.
전문가들은 금리를 낮춰도 투자나 소비 등 실물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유동성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윤창용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금리가 낮다는 건 채권가격이 최고라는 의미인데, 현재 채권가격이 떨어질 일밖에 안 남은 상황이라 대출 등 신용창출은 더디고 가계든, 기업이든 현금을 쥐고 있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경기둔화 우려가 커 금리를 낮추는 통화정책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윤 연구원은 "하반기 추경예산 편성 등 재정정책이 함께 가지 않는 이상 경기 진작은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갈수록 확대되는 연쇄위기의 공포도 돈의 통로를 막고 있다. 이지형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연초만 해도 미국이나 중국이 그나마 버텨주리라 믿었는데, 3월이 지나면서 유럽은 그리스에서 스페인 등으로 문제가 확산되고 미국과 중국마저 어려워지니 투자를 아예 접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대내외적으로 실물이 받쳐주지 않으면 돈맥경화 현상이 쉬 풀리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경기부양책이 효과를 내고 미국 경제가 안정되는 것이 심리 회복의 관건"이라고 내다봤다. 중국 역시 잇단 금리 인하 등으로 돈을 풀고 있지만, 그 효과가 나타나려면 8~9월은 돼야 한다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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