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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8> 흡연실 - 위태로운 실험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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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의 공간엿보기] <8> 흡연실 - 위태로운 실험의 공간

입력
2012.07.1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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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만 보고 섣불리 뭐라 하기 조심스럽지만, 최근 생긴 일본의 유료 흡연소는 기괴한 쇼윈도나 전시공간 같다. 사교나 휴식의 기미 없는 삭막한 투명 밀폐 공간. 상상 속에서 유리 벽을 콘크리트나 불투명 아크릴로 바꾸고 거기에 배기장치를 얹어놓으면 느낌은 더 섬뜩해진다. 나치의 상상력이 저와 흡사했을까.

물론 저 곳은 자발적인 임시 유폐공간이다. 목적은 간명하다. 목 마른 러너처럼 담배 연기를 허겁지겁 빨아들이는 것. 이용자들의 표정 없는 얼굴은 유리 벽 바깥 시민들 요컨대 구경꾼의 시선에 움츠러들 것 같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가면인지 모른다.

사진 앵글너머 시민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위험한 존재들의 격리공간을 보듯 신기해하며 훔쳐볼까? 타락한 취향에 대한 혐오와 연민을 감추며 교양을 발휘해 외면할까? 두어 세기 전 구미 여러 나라의 고상한 시민들이 대서양 너머에서 '포획'해 온 한 검은 피부의 숙녀(호텐토트의 비너스)를 관람하며 인종적 우월감을 과시하던 때의 그 표정들과는 얼마나 다를까?

아니면, 이 모든 불편한 생각들이 주눅 든 한 흡연자의 과도한 피해의식에 불과한 것일까?

저 유료 흡연소의 상업적 실험이 성공한다면, 그래서 후발 업체들이 잇달아 생겨 저 공간이 길 모퉁이의 공중전화 부스처럼 범상한 일상의 그것으로 자리잡는다면, 업자간 경쟁 덕택에 공간 설비나 인테리어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바뀔지 모른다. 아니면 가격 경쟁력 쪽으로 치달아 더 삭막해지거나. 분명한 것은, 지금도 충분히 삭막해 보이는 저 상징적 뉴스공간이 멸종 위기종에게 허락된 동물원의 우리처럼,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아슬아슬한 공존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형식은 윤리적으로도 아슬아슬해 보인다.

흡연(자)에 대한 사회적 배타가 시작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그게 근년 들어 표나게 가열차졌다. 안에서 바깥으로, 공원으로 거리로, 끝간 데 없는 금연공간의 확장이 가장 가시적인 변화다. 지자체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잇달아 금연조례를 제정하고 있다. 최근 한 재벌기업은 사옥 반경 1km 이내로 금연구역을 확장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회사가 직원들의 사생활에까지 저렇게 거침없이 개입하는 배경에는 예상되는 일각의 잡음쯤은 가볍게 진압할 수 있다는 윤리적 자신감이 깔려있는 듯하다. 오랜 세월 흡연자들이 염치 없이 누려온 세상의 관용은 사리 물때의 서해 썰물처럼 빠르게 잦아들고 있다.

아파트 베란다는 상징적 흡연 공간 가운데 하나다. 주거 건물의 베란다는 일종의 전이 공간, 매개의 공간이다. 건물의 안과 바깥을 이어주는, 안도 바깥도 아닌 이 감각적 소통의 공간이 언젠가부터 거실이나 안방으로 확장되거나 풀 꽃 야채 등이 자라는 실내 정원으로 포섭되면서, 요컨대 적극적인 '일상 공간'으로 바뀌면서, 서둘러 흡연자들을 쫓아냈다. 대개 부엌과 이어지는 뒤쪽 베란다 역시 이웃 층 주민들의 민원과 아파트 자치회의 '금연 아파트' 선언에 직면해 마음 편한 공간이 아니게 됐고, 치안과 안전을 이유로 옥상마저 일찌감치 폐쇄되면서 흡연자들은 단지 바깥 거리로, 감각 부재의 구석 자리로 한 없이 내몰리고 있다.

사무빌딩의 흡연 공간은 더 희귀해졌다. 도심 빌딩치고 금연빌딩 아닌 곳이 드물어 합법 흡연실은 사라진 지 오래됐고, 관리(감시)가 느슨한 비상계단 난간 정도가 드물게 남은 흡연 공간이다. 그나마도 계단이 외부인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경우에 한해서다. 그 공간은 볕이 안 들어 늘 어둡고 에어컨 실외기 등의 소음과 열기로 가득한, 말 그대로 비상(非常) 공간이기 쉽다.

멋과 자유와 관능의 이미지로 우쭐거려온 담배가 실은 음흉한 악당이었음이 폭로된 것도 오래 전 일이다. 방대한 임상자료와 과학 데이터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흡연의 생물학적, 환경적, 보건경제학적 폐해를 부정하는 것은 이제 어리석다. 담배의 어떤 미지의 성분이 수명 연장 등 삶의 가치 향상에 획기적으로 기여한다는 새로운 발견이 없는 한, 그 처지가 표나게 개선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공적인 자리에서 흡연을 옹호하는 일은 사회적 자살을 각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만용이 됐다.

그렇지만, 아니 그래서 더, 흡연자들의 심리적 저항감이 부풀어 오르는 건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리 심하게, 쥐 잡듯 몰아붙여도 되는 거냐"는 거다. 못 끊는 게 다 내 탓이냐, 마약이라면서 사고 팔게 해놓고 여전히 막대한 세금 챙겨가는 국가는 뭐냐, 게다가 가족과 이웃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이기적 파렴치한이라니…, 알고 보면 나도 희생자다, 등등. 저 저항감의 바탕에는 금연 자체에 대한 반감보다는 '쥐잡기식' 방식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근년의 금연 운동 양상은 1950~70년대의 전 국민 쥐 잡기 캠페인과 흡사하다. 서식지 일소, 보건 및 사회경제적 해악 홍보, 포획 포상(벌금) 등이 그렇다. 쥐의 몸통에 붉은 빗금을 그어놓은 '쥐 잡는 날' 홍보 포스터에서 쥐를 담배로 바꾸기만 하면 그대로 오늘의 금연포스터가 된다. 인과의 초점과 책임 소재를 흐리는 자리에 흔히 등장하는 "나도 희생자"라는 항변도 이 경우 그리 불합리한 억지는 아니다. 해악이 덜 알려졌던 시절 의사들은 담배를 만병통치약처럼 권했고, 지자체들이 세수 증대를 위해 '내 고장에서 담배 사기'캠페인을 벌인 것도 불과 얼마 전이다. 백해무익하다는 담배의 가격(담배소비세) 인상을 놓고 세수와의 함수관계를 저울질하는 국가의 이중성도 있다. 그렇다고 흡연자를 희생자라고 동정하긴 어렵지만, 이 모든 논쟁적 풍경 자체가 문화와 역사가 빚은 아직 덜 끝난, 어쩌면 끝나지 않을, 비극의 한 장면쯤은 될 것이다.

담배의 유ㆍ무죄를 (의)과학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겨 에누리없이 절대악으로 짓밟는 것은 부당하다는, 다소 낭만적인 항변도 있다. 담배 안 피우는 가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매력이 덜했을 것이고, 샤론 스톤에게 담배가 없었다면 영화 '원초적 본능'의 저 관능적 장면은 맥이 빠졌을 듯하다. 초상화와 사진으로 기억하는 시인 이상과 김수영의 담배도 있고, 담배와 술 심지어 아편과 해시시에 의지하며 그 환각의 힘으로 현실의 불안과 세기말의 절망에 맞섰던 보들레르, 에드거 엘런 포 등 숱한 예술가들도 있다. 담배를 끊은 뒤에도 시가를 지니고 다니면서 사진기자가 나타나면 물곤 했다는 영국 수상 처칠, 쿠바와의 통상금지 조치 직전 워싱턴 시내의 쿠바산 시가를 매점(買占)했다는 존 F. 케네디, 국교단절 전 그 케네디에게 시가 한 상자를 선물하며 회유하려 했다는 체 게바라도 있다. 만성 천식에 폐기종 진단까지 받고도 시가에 탐닉했던 게바라는 의사에게 애원해 '하루 딱 한대'라는 허락을 얻어낸 뒤 터무니없이 긴 특제시가를 주문 제작해 즐겼다고 한다.

'흡연 공간'이라는 소재를 권한 한 후배는 '에이 씨발~'이라고 뱉어줘야 할 상황에 '아이 나빠'라고 투정을 하면 제 맛이 나겠느냐고, 담배는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담배에는 똑 부러진 세상에 발맞추기 거부하는 이들의 항변이란 의미도 있는데 무조건 막는 것은 웃기는 발상"이라고, "인생의 슬픔과 절망과 타락과 유혹의 자리마다 함께 했던 담배의 역할까지 부인하고 추방하는 건, 솔직히 철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을 '철없다'고 말할 이가 훨씬 많겠지만, 거기에도 인류가 오래 고민해온 철학적 선택의 문제가 내포돼 있다.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된 뒤 프랑수아즈 사강이 했다는 저 유명한 말- 나는 타인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내 자신을 파멸시킬 권리가 있다-은 자유주의 논쟁의 기억할 만한 한 국면을 떠올리게 한다.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이 (적극적)자유를 옹호하며 '개인이 자아실현을 위해 특정 자원이 필요할 때 그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자원과 행동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자유'라고 정의한 데 대해 현대의 (소극적)자유주의자들은 '자유와 자아실현은 별개의 것이며, 사람은 자신이 좀 더 높게 평가하는 목표를 위해서 자신이 누릴 자아실현의 기회를 희생하는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금연 운동이 폭발적 동력을 얻게 된 것은 물론 간접흡연의 폐해가 적극적으로 부각되면서부터다. 간접흡연의 해악은 흡연론자들이 의지해 온 저 소극적 자유론에 꽤 듬직한 재갈을 물린 듯 보인다. 혐연의 자유가 흡연의 자유에 우선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곧장 흡연권을 부정하는 논리로 잇는 것은 폭력적이다. 흡연 장소를 없애면 불편해서라도 끊겠지 하는 식의 발상은 '모두를 위한다'는 그럴싸한 치장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으로는 소수에 대한 억압과 탄압이다. 가령 서울 남산 전역을 금연공간으로 지정하면서 흡연소를 설치하려던 당초 계획을 전면 백지화한 판단의 기저에 소수의 흡연권은 무시해도 좋다는 편의적 발상과 옳은 것이면 강압적이어도 된다는 억압의 논리는 없었을까.

흡연권자들은 정부와 과학이 연간 7,8조원에 이르는 담배 관련세와 건강증진기금 일부를 헐어 간접흡연의 해악을 없애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실용적인 장치와 도구를 개발하라고 촉구한다. 그것이 다수를 명분으로 소수를 억압해온 민주주의의 편리한 관행이자 병폐를 극복하는 길이고,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국가와 지자체가 지녀야 할 흡연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것이다. 흡연장소를 설치하는 것을 흡연을 권장하는 것과 혼동하는 이가 있다면, 그 역시 국가가 설득할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금연전문 상담의 김관욱 박사(<굿바이 니코틴홀릭> 의 저자) 조언 즉 "금연 운동은 담배에 관한 의학적 측면은 물론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측면까지 깊이 있게 성찰할 때에만 비로소 인류를 더욱 행복한 길로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저 삭막한 유료 흡연소는, 철조망 세우고 덫 놓는 것을 능사로 아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안이한 금연정책을 겨냥한 통렬한 풍자 공간 같기도 하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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