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장관이 모처럼 만났지만 서로를 외면하며 무신경하게 지나쳤다.
김성환 외교장관과 북한 박의춘 외무상은 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함께 참석했지만 회의장 안팎에서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피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양측 모두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6자회담 재개 가능성이 높았던 지난해 ARF 회의 때 손을 맞잡으며 친분을 과시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서로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날 오전 9시(현지시간) 캄보디아 훈센 총리를 예방하기 위해 27개국 외교장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먼저 도착해 있던 박 외무상은 뒤이어 김 장관이 들어서자 고개를 돌리며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장관도 다른 나라 참석자들과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박 외무상에게는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김 장관을 외면하던 박 외무상은 중국 양제츠(杨洁篪) 외교부장이 나타나자 그 곁으로 자리를 옮겼고 김 장관은 양 부장 건너편에서 다른 국가 장관들과 담소를 이어갔다.
오후에 열린 ARF 전체회의에서도 남북한 장관은 의장석 양편으로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았지만 시선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외교부 관계자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대화 모멘텀이 실종됐기에 남북한 장관이 만나 특별히 할 얘기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 대표단은 ARF 회의 도중인 오후 4시 기자회견을 예고해 박 외무상이 입을 열지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오후 5시30분쯤 북한 외무성 아주국 김영조 과장이 나와 "우주 개발과 경수로 건설, 미국에 대응해 핵 억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북한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며 영문으로 적힌 A4용지 한 장을 돌리고는 사라졌다.
유인물에는 한미 양국의 대북 적대정책에 대한 비판, 북한 핵 억제력 확보의 당위성, 경수로 건설과 평화적 위성 발사의 필요성 등 북한의 기존 입장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서둘러 만든 탓인지 회의 참석자 이름이 2007년 사망한 전 외교장관 백남순으로 기재돼 있었다.
한편 13일 발표될 예정이었던 ARF 공동성명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으로 결국 채택되지 않았다. 이는 아세안이 설립된 뒤 45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외교소식통들은 필리핀과 베트남이 공동성명에 중국의 영유권 침범과 관련한 구체적인 언급을 담자고 요구했으나, 중국과 가까운 캄보디아가 이를 반대해 결국 공동성명 채택에 실패했다고 전했다.
프놈펜=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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