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학교 밖을 벗어난 적이 별로 없었다. 배우거나 가르치면서 세월을 보내다보니 알고지내는 사람도 대부분 교수거나 학생이다. 사회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자괴감도 자주 느낀다. 위안이 있다면, 꽤 오랜 기간 동안 젊은이들과 부대끼는 즐거움을 누렸고, 그 와중에 이들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관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하고 불안을 느끼기도 했던 세월이었다.
교수가 되어 처음으로 대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했던 때가 딱 15년 전이었다. 열정적인 학생들, 침울한 학생들, 냉소적인 학생들, 여러 얼굴의 학생들이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개인적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IMF사태로 명명되던 경제위기를 대학 재학 중 경험한 이들에게 안정된 직장을 찾아 취업한다는 것은 강박적 당면과제였고, 동시에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였다. 졸업생의 취업률이 교수 평가의 일부가 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15년 전의 삐삐는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었지만 대학생들의 불안함과 강박증은 변하지 않았다. 학점도, 해외연수도, 자격증도, 인턴도 모두 대학생이라는 '현재'가 아닌 사회인이라는 '미래'를 향한 과제물이 되었다. 미적분 숙제와 다름없는 의무적 통과의례. 고등학교 때 대학 입학이라는 코앞의 목표를 위해 올인했듯, 대학생활은 안정적 직장을 위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아마도 취업한 졸업생들은 다시 승진이나 내 집 마련이라는 또 다른 목표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IMF 체제가 만들었던 대학문화의 변화가 예외적이고 일시적일 것이라던 나의 예측과 바람은 순진하고 무지한 발상이었다.
전공과 무관한 고시공부를 하거나 조금이라도 나은 학점을 위해 이런 저런 꼼수를 부려보는 오늘의 대학생들을 마냥 흉볼 수는 없다. '88만원세대'라는 용어가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비정규직의 시대이고 내가 내 몸 알아서 돌봐야 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이다. 이 시대를 만든 기성세대들의 허물을 생각하면, 이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을 차마 질책할 수 없다. 하지만 궁금하다.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살아남기 위한, 혹은 이기기 위한 이 경쟁은 언제 비로소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의 고통을 후배나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는가?
학생들의 학업능력이 발전한 것은 분명하다. 영어 대화 정도는 별 어려움 없이 하고, 수업 준비도 과거와 비할 바 없이 성실해졌다. 하지만 '하나의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훌륭한 답안을 쓰는 학생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현실 속 사례를 들어 답을 쓰라고 하면 열 중 여덟은 수업 중 언급했던 에피소드를 쓴다. 정해진 답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하는 학생들. 제도권 편입에 대한 열망이 제도권에 대한 불만을 압도하는 학생들. 이렇게 만든 것은 기성세대일지라도, 거기에 저항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내심 안타깝다.
저항은 젊은이들의 특권이다. 버릇없다는 말을 들을지언정, 혹은 뜬구름 잡는 몽상가로 폄하될지언정, 지배적인 흐름에 발랄하고 발칙하게 대들 수 있는 사람이 대학생이다. 대학 시절의 치기는 여물어서 도전정신이 되고, 엉뚱함은 언젠가 생산적 창의성이 되며, 고뇌는 축적되어 통찰력이 될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고 이런 것을 배우는 곳이 대학이다. 스펙을 쌓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대신 도전과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레 스펙이 쌓이는 것이 대학생활이어야 한다.
대학 청소노동자나 비정규직 강사의 교내 시위를 학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학생들이 있었다. 생존을 위해 경쟁한다면 반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끝을 알 수 없는 경쟁의 무의미함을 자각한다면 연대하는 것이 마땅했다. 시위하는 그들의 모습은 곧 자신과 후배와 자식들의 미래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꼭 촛불을 들어야만 저항은 아니다. 지배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투항보다는 저항의 준비가 되어있는 대학생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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