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연극 '숙자 이야기'가 무대에 올려진 경기 평택시 팽성국제교류센터. 칠순에 가까운 할머니 10여명이 무대 위에 마련된 한 기지촌 여성 영정 앞에 장미꽃을 올려 놓았다. 객석의 관객들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하나 둘 무대에 올라 묵념했다. 이어 배우들이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자 100여 관객들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숙자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이랬다. 무대와 객석은 온통 눈물 바다였다. 무대의 영정은 최근 기지촌의 쪽방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난 여복동 할머니다.
'숙자 이야기'는 여느 상업적인 연극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젊은 시절'기지촌 여성'이었던 할머니들의 험난했던 삶을 다룬 사회성 짙은 소재라는 이유외에도 할머니들이 직접 배역을 맡은 까닭에서다. '숙자'는 한 할머니의 실명이다.
연극 배우로 변신한 기지촌 할머니들은 15명. 모두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일대에서 미군을 상대하면서 오랫동안 생계를 꾸려온 공통점이 있다. 나이가 들어 일을 그만두고도 오갈 데가 없어 정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1시간 동안의 공연에서 기지촌 할머니 배우들은 각자 맡은 배역을 100% 소화해 냈다. 모든 장면 장면이 자신들의 아픈 경험들이었기 때문이다.
연극엔 11개 배경이 등장했다. '숙자'가 기지촌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내용이 그려진 '고향 떠나온 날', 미래를 약속했던 미군으로부터 버림 받은 얘기를 담은 '사랑', 살아서도 사람대접 못 받고 죽어서도 사람대접 못 받는 현실을 녹여낸 '장례식장' 등이 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기지촌 할머니 배우들은 당당했다. 오랜 연습 덕분인지 거침없이 대사를 쏟아 냈다. 연극을 주최한 햇살사회복지회 측은 "할머니들은 지난 3주 동안 전문 연극인의 지도로 맹연습했다"고 귀띔했다. 앞서 이들은 3월 15일부터 3개월 동안 심리 치료 연극 워크숍 '밝고 당당하게 살자!'에 참여하기도 했다.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할머니들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주인공 '숙자'역의 엄모(67) 할머니는 "남몰래 묻어뒀던 아픈 기억이 자꾸 떠올라 연기가 힘들었다"고 했다.'숙자2'를 연기했던 김모(65) 할머니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싫어 어제까지도 망설였는데 끝내고 보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하다"고 털어놓았다. 평택 기지촌에서 40여 년을 보내고 있는 김모(65) 할머니는 "'양공주', '양색시'라 불리며 천대 받았던 아픈 기억을 떠나 보낼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워크숍과 연극 연출을 맡은 노지향 연극공간-해 대표는 "할머니들 모두 혼자 생활하시던 분들이라 처음엔 따로 존재하는 섬 같았지만 워크숍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경계를 풀었고, 연극을 준비하면서 마음을 터놓고 어울렸다"고 전했다. 기지촌 여성들을 돕고 있는 복지단체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대표는 "기지촌 할머니들이 눈물을 떨쳐내고 여생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평택=손효숙기자 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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